이경일 회사원

봉건(封建)의 원조 격인 춘추시대(春秋時代) 초기에는 모든 권력을 천자(天子)가 쥐고 있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도 시간이 점점 지나 피가 묽어질수록 주(周)나라 천자의 권위는 떨어졌다. 그래도 제후국들 사이에 패권쟁탈 과정에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주 왕실의 천자를 이용하려고 했다. 권위는 떨어졌지만 천자의 명분만은 살아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주 왕실을 보호한다는 기치를 내걸면 더욱 통했다.

춘추 중기에 정(鄭)나라 장공(莊公)은 송(宋)나라를 정벌하고 싶었으나 구실이 없었다. 송나라는 은(殷)나라 후예들로 자존심도 강하고 나라 크기도 정나라보다 큰 나라였다. 그러므로 정벌을 하려면 확실한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궁리 끝에 천자의 재가를 얻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장공은 제족(祭足)을 데리고 주나라 천자를 조회하여 천자가 정나라를 신임한다는 것을 보여주게 만들려는 계책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의 천자는 환왕(桓王)으로 장공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공이 환왕을 배알(拜謁)하려 왔을 때 장공을 골탕을 먹이려고 거친 기장쌀로 수레 열대 분량을 하사품으로 주었다. 기장쌀을 준다는 것은 거의 모독에 가까운 냉대다. 이렇게 천자의 환영을 받지 못한 장공은 괜히 왔다며 투덜대고 후회했다. 그러자 동행했던 제족이 좋은 책략이 있다고 장공에게 귀띔을 했다.

수레 열대에 기장쌀을 싣고 화려한 비단으로 덮은 뒤 ‘천자의 은총’이라고 글을 쓰고 마치 귀한 보물처럼 꾸며 성도(成都)를 떠날 때 천자가 하사하신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자랑하며 행군했다. 그러면서 ‘송나라는 오랫동안 조공도 바치지 않고 있으니, 내가 친히 천자의 명을 받아 우리 군으로 송을 치겠노라’고 허풍을 치면서 돌아왔다. 모든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천자의 하사품이고 조만간 송을 정벌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소식은 송나라에 금방 전해졌다. 송나라 제후 상공(殤公)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정나라와 화의(和議)를 맺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장공은 송나라를 정벌하려는 욕심에 화의를 거절하고 천자의 이름으로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에 정이 송을 정벌하는데 동참하라는 거짓 명령까지 내렸다. 장공은 삼국 연합군을 이끌고 천자의 이름을 받들어 죄를 다스린다는 기치아래 송을 쉽게 정벌하여 고(郜)와 방(防) 두 개의 성을 탈취하였다.

장공의 목적은 달성했다. 그래서 춘추 초기에는 정나라가 강성한 나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 후에 제나라의 환공과 진나라의 문공을 거치면서 패업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주(周)를 떠받드는 존주(尊主)의 기치를 버리지 않았다. 그 후부터 권력이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최고 권력자가 자기편인 것처럼 속여 위세를 떠는 경우에 많이 인용한다.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최고 권력자의 이름을 거짓으로 사용하는 것이 빠르다. 현재도 권력자를 이용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특히 선거 때는 옛날에 찍은 사진까지 동원하여 권력자 친한 것처럼 보이며 이용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를 ‘가탁왕명’이라고 한다.

이경일 회사원(대한시멘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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