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일 회사원

중국은 나라가 큰 만큼 역사상 간신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현재까지 가장 구린내 나는 재상급 간신 세 명을 꼽는다면 당 왕조시기 ‘구밀복검(口蜜腹劍)’으로 이름난 이임보와 본보 간신론에 나온 송 왕조시기 명장 악비(岳飛)를 모함해서 죽인 매국간신 진회(秦檜),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명 왕조 때 재상 간신으로 아들 엄세번(嚴世蕃)과 함께 부자간신으로 알려진 엄숭(嚴崇)이다.

여러 간신들 중에서도 엄숭은 학력이 출중하여 명나라 지식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학식을 갖춘 학자였다. 지식인으로 인정받을만한 시집도 있고 문집도 역대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수준급 이었다고 한다. 엄숭은 다른 무식한 간신들에 비해 잘 배운 만큼 간행도 화려하다. 그는 아들과 함께 간행을 저지르며 나라를 나락으로 빠뜨린 사람이다. 그가 간신으로 국정을 농락한 기간이 무려 20년이 넘는다고 하니 얼마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겠는가.

어느 시대나 이런 악독한 간신이 출현하면 일반 백성들이 감내해야할 것은 더욱 피폐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달픈 것이다. 현시대에도 선택을 잘못하면 간신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으며 미래까지 저당 잡히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엄숭은 1480년 명나라 헌종(憲宗) 때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했으면서도 과거시험에 집착하리만치 매달렸지만 끝내 급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엄숭은 아버지의 한을 풀려고 그랬는지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보이며 부친의 한이었던 과거를 열심히 노력하여 2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진사에 급제하여 편수관으로 관료사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 비상(飛上)을 하기위한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엄숭은 젊은 시절의 관직 생활에서도 사태나 정치적 동향을 보는 관점이 탁월했으며 신중하고 보통 사람과는 방향이 다르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입신하자마자 출세를 하기위해 자기의 뒤를 봐줄만한 줄을 잡으려고 찾고 있었다. 편수관으로 하위관직에 있으면서도 동아줄을 찾았는데 걸린 사람이 환관(宦官) 유근(劉瑾)을 지목하게 되었다. 유근은 환관이면서도 당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중했던 엄숭은 유근이 명성은 있으나 환관이기 때문에 끝이 좋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고 유근을 경계하게 된다. 나중에 유근 때문에 화를 피하기 위해 병을 핑계로 고향 쪽으로 가서 약 10년 동안을 은거하며 지냈다.

이 시기에 시와 글을 쓰면서 산을 나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유근이 실각하여 죽임을 당하자 곧바로 복직을 신청했다. 그러나 아직 연줄이 없었고 은거생활이 길었다는 이유로 복직이 늦어져 애를 태웠다. 그래서 궁 안 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한직을 전전하며 10여년의 세월을 다시 보내게 된다. 유근을 피하기 위해 은거했던 것과 합해서 20여년을 기다린 셈이다.

마침내 보상받을 기회가 찾아왔다. 조정안에 벼슬아치들을 살펴보니 자신을 돌봐 줄만한 큰 제목이 눈에 띈다. 일면식도 없고 나이도 자기보다 어리지만 황제의 내각수보에 있던 동향사람 하언(夏言)이었다. 하언은 엄숭보다 진사급제가 12년이나 늦은 까마득한 후배였으나 엄숭이 바깥을 도는 동안 더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언은 재상으로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내각 실세로 군림하고 있었다.

엄숭은 하언을 지목한 후 선후배를 따지지 않고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하언 이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기로 했다. 엄숭은 동향이라는 점을 내세워 하언에게 몸을 낮추고 정성을 다하여 접근하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볼 때에는 고향 후배에게 이런 행동은 비굴하고 유치한 행동이었으나 간신들이 생각할 때는 ‘통과의례’에 불과한 일이었다. 이 거인의 어깨에 오르기 위해서는 엄숭에게 이 정도는 새 발의 피다.

그러나 황제인 세종에게 총애를 받으며 나랏일을 좌지우지하는 하언의 자존심은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였다. 그러니 엄숭을 거들떠 보기나 하겠는가. 여기에서 포기한다면 간신 엄숭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언의 환심을 사려고 궁리하던 끝에 저녁식사에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초대했다. 그러나 하늘을 찌르는 권력을 가진 하언은 엄숭의 저녁 식사 초대를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다.

그러자 엄숭도 조바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가라앉힐 수 없는 엄숭은 직접 초대장을 들고 하언의 집을 찾아갔다. 하언은 대문도 열어주지 않으며 문전박대했다. 오기가 발동한 엄숭은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절한 목소리로 자신이 찾아온 연유를 간절함을 담아 시적으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애절함이 배어있었다.

하언은 엄숭의 정성에 매료되었고 문을 열고 나와 직접 꿇어 엎드린 엄숭을 부추겨 일으켰다. 엄숭의 집에 저녁 식사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2부로 계속>

이경일 회사원(대한시멘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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