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일 회사원

춘추시대 진(晋)나라는 비교적 규모가 큰 나라였다. 기원전 560년경 진나라 헌공(獻供)시절 괵(虢) 나라를 치자는 계책을 대부 순식(筍息)이 올렸다. 헌공이 괵 나라를 치려면 우(虞) 나라를 지나야 하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우 나라에는 잠시 길을 빌리면 된다고 했다. 길을 그냥 빌려주지 않을 것 이므로 산서성 북굴(北屈)에서 나는 좋은 명마(名馬) 네 필과 산서성 수극(垂棘)에서 나는 천하에 귀한 보물 미옥(美玉)을 우 나라에 주고 길을 빌려 달라고 하면 길을 내 줄 것 이라고 했다.

진헌공은 난색을 표하며 “그것은 우리나라 최고의 보물이오, 그 귀한 보물을 준단 말이오.” 순식은 차분한 어조로 헌공을 설득한다. “이 보물을 주고 우 나라에 길을 빌릴 수만 있다면 이는 우리 창고 안에 있는 물건을 잠시 밖에 옮겨 두는 것에 불과합니다.” 헌공은 믿어지지 않는 다면서 거듭 난색을 표하며 “우 나라에는 궁지기(宮之奇)라는 현신(賢臣)이 있소. 그들이 그 계책에 속지 않을 것이므로 어렵다는 것이오.”

순식이 거듭 강조한다. “궁지기가 현신이기는 하나 연약한 위인이므로 강력하게 주군을 설득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어려서부터 궁 안에서 함께 우공(虞公)과 자랐으므로 서로 친밀한 탓에 궁지기가 간해도 어리석은 우공이 듣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순식의 설득에 헌공은 허락하고 순식으로 하여금 미옥과 명마를 뇌물로 주고 길을 빌리게 했다. 우 나라 군주를 만난 순식은 “지금 괵 나라는 무도하여 객사 안에 보루(堡壘)를 쌓고 우리 진나라를 비롯한 당신의 우 나라를 치려하고 준비하고 있으니 반드시 그 죄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 나라가 선봉이 되어 우리 진나라와 함께 괵 나라를 쳐야 합니다.”

진 헌공의 생각대로 현신 궁지기는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궁지기가 들고 나온 말이 ‘순망치한(脣亡齒寒)’이다. “괵 나라와 우 나라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괵 나라가 망하면 우 나라도 망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 하므로 절대 길을 빌려줘서는 안 됩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결코 길을 빌려 줘서는 안 됩니다.” 하고 극구 반대 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 나라 군주는 뇌물에 혹해 길을 내어주고 괵 나라를 치는데 군사까지 동원 하였다. 괵 나라를 손쉽게 정복한 진나라는 돌아오는 길에 우 나라를 간단히 치고 전에 주었던 뇌물을 다시 거둬 귀환한다. 진 헌공은 돌아온 명마들을 쓰다듬으며 “내 곁을 떠나가더니 살이 더 올라 왔구나.” 하며 흡족해 했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한문 입문서로 천자문(千字文)을 배운다. 천자문에 가도멸괵(假道滅虢)이 나온다. 그래서 웬만한 벼슬아치들은 가도멸괵을 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기치를 내걸고 일본이 침범해 왔었다. 즉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잠시 길을 빌려주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한 ‘정명가도(征明假道)’가 ‘가도벌괵’을 흉내 낸 말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 에게 먼 나라를 치기위해 길을 빌려주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뻔한 구실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최초로 맞이한 동래(東萊)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은 유명한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전쟁에 나가 죽기는 쉬어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이라는 말을 남기고 장열하게 싸우다 순절한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현재 정읍(井邑)에 속해있는 동학 농민운동의 진원지이기도한 고부군(古阜郡) 사람이었다. 조선 선조 때 동래부사로 재임 중 임진왜란을 만나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임란공신이다.

이경일 회사원(대한시멘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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