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일 회사원

나이는 어리지만 직책은 자기보다 높은 하언(夏言)과 식사를 한 뒤부터는 늘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갖은 아첨과 미사여구로 하언의 마음을 기쁘게 했으며 그의 마음을 사게 되니 하언 역시 천하에 둘도 없는 지기(知己)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까워지고 보니 하언은 당연히 엄숭을 황제에게 추천하기에 이른다. 내각수보로 재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추천은 곧바로 받아들여져 엄숭의 관운(官運)은 빛을 보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하언은 일생일대의 과오를 범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자기 무덤을 파는 일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알고 있었다면 단 한사람 엄숭 당사자뿐일 것이다. 이때부터 엄숭은 갖은 음모와 아첨으로 승진을 거듭하며 얼마 안가서 황제를 직접 배알할 수 있는 예부시랑에 임명되었다. 여기까지는 자기의 능력이나 아첨 그리고 음모까지 가미되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하언의 힘이 많이 작용했다.

예부시랑이 되어서부터 하언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최고 권력자 황제를 직접 상대할 수 있으니 이런 간신들에게 다른 사람이 눈에 보일 수가 없다. 엄숭이 20년을 한직으로 전전하며 보낸 보람이 이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어리석은 간군(奸君)이 존재할 때 간신(奸臣)이 만들어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포부가 대단한 엄숭에게 예부시랑이란 자리가 양이 차는 자리는 아니다. 그의 포부는 만인지상(萬人之上) 일인지하(一人之下)의 재상(宰相)자리다. 천자는 반란을 일으키거나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 하므로 제2인자인 재상자리를 탐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황제의 신임을 얻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왕조체제에서는 절대 권력자 한사람에게 집중되어있으므로 황제가 최종 목표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엄숭은 우선 자기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황제의 총애를 얻는데 온갖 정성을 쏟아 부었다. 천하의 엄숭에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황제의 명을 받고 호광안로에 있는 황제의 생부 무덤에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엄숭에게는 기가 막힌 절호의 기회였다. 자기의 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천하에 간신이 되지 못한다.

일을 아무 탈 없이 순조롭게 마치고 돌아와 보고하면서, 황제에게 온갖 좋은 이야기를 가져다 붙여 이런 상서로운 조짐을 비석에 새겨 후대에 본이 되도록 세우자는 건의를 올린다. 이 말을 듣고 싫어할 아들이 누가 있겠는가. 바로 엄숭이 노린 것이 이것이었다. 세종의 혼을 쏙 빼놓은 비석에 새길 이 글들은 시와 문장력에 능한 엄숭의 전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나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하여 잘 작성 했겠는가. 세종은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즉석에서 예부상서로 진급시키고 엄숭을 신임하기 시작햇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종은 생부 신위를 태묘로 이장(移葬)하는 문제를 거론했다. 신임을 얻은 엄숭은 예의상 타당하지 않다는 의견을 냈다. 얼굴이 상기된 세종은 엄숭에게 벼락같이 호통을 치며 나무랐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몸을 떨고 숨을 몰아쉬며 화를 얼른 삭이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세종의 반응에 엄숭은 놀라면서도 재빨리 사태를 인지하고 앞에서 한말을 완전히 뒤집어 세종의 뜻대로 처리했다.

나중에 엄숭이 모든 일을 폐하의 분부대로 예법에 맞게 잘 처리했다고 보고하자, 세종은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이 일로 상을 내리기도 했다. 슬기롭게 위기를 모면한 셈이다. 엄숭이 황제의 취향을 파악한 계기가 됐다. 예부상서로 있으면서 부터는 황제와 가까이 있는 시간이 많으므로 그의 취향이 무엇인지를 늘 눈 여겨 보았다.

세종은 미신을 숭배하는 사람이었다. 신선이나 도술을 믿었으며, 도교나 신선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도구인 청사(請詞:죽은 사람의 넋을 부르는 글)를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알았다. 더 나아가 청사의 문장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일까지 시행했으니 세종이 얼마나 청사에 공을 들였는지 알만할 정도다. 이런 황제의 취향을 보고 가만있을 엄숭이 아니다. 자기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세상에 좋은 글은 모두 동원하여 경운부(慶雲賦:하늘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나는 것을 축하하는 내용)라는 청사를 만들어서 세종에게 바쳤다.

생각했던 대로 세종은 엄숭의 청사에 반했다. 구구절절 흠잡을 데가 없었고 문장력이 풍부한 엄숭의 청사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세종은 이 청사를 읽고 또 읽더니 지금까지 쓴 어느 청사도 이를 따를 수 없었다고 칭찬하며 모든 청사는 엄숭이 맡게 되었다. <3부로 계속>

이경일 회사원(대한시멘트)  news@ygweekly.com

<저작권자 © 영광군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