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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스러운 빛 영광(靈光)] 35,000년 역사…세계 유일의 4대 종교 성지
유창수 기자 | 승인 2021.02.23 17:02 |
▲사진 좌측부터. 시조 부흥운동을 이끈 조운 시인(왼쪽), 1인 예술의 정점을 보여준 공옥진 여사,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다산학 연구를 이끈 이을호 박사

영광은 선사시대부터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 다양한 문화를 꽃피워 왔다. 넓은 바다, 육지와 가까운 크고 작은 섬, 그리고 바다로부터 유입된 만(灣)과 이곳에서 시작된 물은 문화를 성장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칠산 바다와 법성창으로 대표되는 풍요의 땅 영광. 영광 사람들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 했다. 불교·원불교·천주교·기독교 등 4대 종교의 성지로 사유와 실천을 함께 했다. 35,000년 전인 중기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영광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신석기시대에는 육지와 가까운 섬과 바다를 중심으로 살며, 어류와 조개 등을 식량자원으로 활용했다. 청동기시대에는 산 아래 낮은 언덕에 마을을 만들어 함께 살며 고인돌을 무덤으로 사용했다.

무시이군(武尸伊郡)→무령군(武靈郡)→영광군(靈光郡)

역사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대규모 마을을 만들고 나라를 꾸미며 마한의 소국이 되었고, 5세기 후반부터 백제문화를 받아들였다. 이후 영광읍을 중심으로 고창과 주변의 섬 지역을 다스리는 무시이군(武尸伊郡)이 되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도 무주(지금의 광주) 소속 무령군(武靈郡)으로 이름만 바뀌며 그 명성을 이어갔다.

고려 시대인 995년(성종 14)에 영광군(靈光郡)이 됐다. 1018년(현종 9년)에 강남도(江南道 : 현 전라북도)와 해양도(海陽道 : 현 전라남도)를 통합, 전라도라 개칭했다. 이때 영광군이 전라도 관할로 되었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군(郡)으로 복귀하기를 몇 차례 거듭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전국을 23부로 개편할 때 전주부에 속했다가, 이듬해인 1896년(고종 33년) 전국을 13도로 개편할 때 전라남도가 생기면서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1906년에 외동면과 삼남면 등 몇 개의 면을 장성군으로, 위도면과 낙월면을 지도군(현 신안군)에서 영광군으로 편입시켰다. 1955년 7월 1일 영광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근대 이후 영광은 동학농민혁명과 의병항쟁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수많은 영광 주민이 동학군에 가담했고, 1906년 김용구(金容球) 등 의병장이 일본군과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한편 행정제도의 개편으로 1914년에 진량면이 법성면으로 바뀌고, 외동·내동·현내·삼남·삼북면 등이 장성군에 이관되어 큰 고을 영광이 빛을 바라게 된다. 안중식의 영광풍경도에서 지금은 사라진 100여 년 전 영광의 모습을 되새길 수 있어 아쉬움을 달랜다.

일제강점기 영광지역은 원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천주교 등 종교의 성지로 떠오른다. 또 원불교를 창시한 박중빈(朴重彬), 시조 부흥운동을 이끈 조운(曺雲), 다산학(茶山學) 연구를 이끈 이을호(李乙浩), 1인 예술의 정점을 보여준 공옥진(孔玉振) 등 수많은 문화 인사를 배출하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영광읍(靈光邑)

‘영광’(靈光)이란 지명은 당시 중앙관청에서 정한 이름으로, 지명이나 성(姓) 등에 있어 통일 신라시기에 중국 한식(漢式)이 확산되고, 고려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합 이후 전국 군현의 개편과 함께 군현 토성을 분정(分定)하면서 한화(漢化)가 정착 되었다. 영광이란 지명을 불(拂)과 연관 짓기도 하지만 지명의 의미는 신령스런 빛의 고을로, 자연의 영묘한 빛이 반짝이는 은혜로운 지역이란 뜻을 담고 있다.

영광읍은 영광군 3읍의 하나로 본래 동부면이라 하여 명곡·교촌·고도·개정·동자동·주만·단촌·월평·언고·신촌·서당·삼호·백동·신흥·비석·하동·연동·대거·백산·하·화동·수동·상둔·양곡·신덕동·옥동·평전·수동·서령·성동·입동·하지 등 32동리를 관할했다.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도내면의 고성·송정·계동·외신·평전·내오·외오·월곡·쌍계·우평·입석·신대·도동·용계·주록·와진의 13동리와 묘장면의 흥곡, 장등의 각 일부와 진량면의 서당촌 일부와 서부면의 무곡 및 옹점·대신·궁산의 각 일부와 전라북도 무장군 와공면 지음리 일부를 병합하여 영광군의 이름을 따라 영광면이라 했다.

그 후 무령·백학·남천·도동·교촌·연성·월평·단주·덕호·신월·양평·와룡·계송·입석·우평 등 15개리로 개편 관할했다. 1955년 6월 29일 법률 제359호에 의하면 영광면은 읍으로 승격되고, 1983년 2월 15일 행정 구역 조정에 따라(대통령 제11027호) 군서면 녹사리·학정리·신하리·송림리가 편입되어 19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동쪽은 묘량면, 북쪽으로 대마면과 홍농읍,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남쪽은 군서면·불갑면, 서쪽은 법성면에 닿아 있다. 영광읍은 영광군의 중심지로 군청소재 지역이다.

▲1910년대 망원루와 홍문(영광읍성 남쪽의 남문과 누정)

영광읍성(靈光邑城)

영광성은 고려조의 우산산성(牛山山城)과 조선조의 영광읍성(이하 읍성)으로 구분된다. 우산산성을 시축한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영광고성(靈光古城)은 본래 우와산(牛臥山)에 위치하였다가 세조 2년 병자년(1456)에 성(城)과 공해(公廨)를 무령리로 이건(移䢖)하였다. 읍성은 조선 단종원년 임신년(1452)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456년에 완공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숙주의 순방기문에 기록되어 있다.

객관 신숙주의 기문에 군이 여러 번 왜구의 난을 당하여 공관이 쓸쓸하다. 예전에는 읍의 남쪽 산기슭에 있었는데 그 산수가 등지어 가고 지리가 불순하며, 더욱이 성보(城堡)는 낮고 무너지고 공관은 비좁기 때문에 임신년에 읍 사람들이 그 사유를 조정에 아뢰어 성을 우와산(牛臥山)의 동쪽으로 옮기니 넓고 견고하며 평탄하여 주위가 넓게 트여서 안에 고나사와 창고, 미곡창고를 세울 만했다. 그해 가을부터 직기 시작했는데 이(李), 정(鄭) 두 군수를 겪었어도 진척이 없었다. 병자년 봄에 이르러 지금 군수 여흥 민효원(驪興 閔孝源)이 앞사람이 세우지 못한 것을 세우고 끝내지 못한 것을 끝내어 문과 창을 내고 단청을 환하게 하니 군(郡) 사람들이 경축하였다.

도선(道詵, 827~898)의 저서라고 전해지고 있는 「옥룡자유세비록(玉龍子遊世祕錄)」에는 도선이 영광군 여러 지역을 답사하면서 풍수를 설명하고, 혈(穴)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필사되어 전해져 온 옥룡자 유세비록에는 영광군 여러 지역의 풍수를 설명하고, 穴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옥룡자 답산가(玉龍子 踏山歌)

허허 탄식하온 후에 영광지경 넘어서니 북칠리(北七里) 양수간(兩水間)에 육륭쟁주(六 龍爭珠)가 더욱 좋다. 여의주(如意珠)를 3개놓고 혈(穴)이 있어 난심(難尋)이라 용장혈졸(龍長穴拙) 하였으니 합금처(合衿處) 겸(鉗)이 있어 평지음사(平池陰砂) 회포(回抱)하니 어느 명안(明眼) 알아볼고 이산 주인 거 뉘련지 수화성(水火姓)이 대발 하리.

읍내를 들어와서 좌우를 살펴보니 동서남북 사방 중에 서남 산수 더욱 좋다. 서오리(西五里) 화접심향(花蜨尋香) 당대에 속발하여 문무과(文武科)도 많거니와 대대 호부(豪富) 하리로다.

간태목성(艮兌木星) 정토혈(正土穴)은 경유수(庚酉水)가 동으로 가니 찾기는 쉽지만 알아볼이 뉘 있을까. 북 이십리 대과협(大過夾)에 자웅지혈(雌雄之穴) 더욱 좋다. 자기목성(自起木星) 수삼절(數三節)에 평지결인(平地結咽) 자조하여 한 가지는 서남에 가서 용사취회(龍蛇聚會)생겼구나 사대승상(四大丞相) 칠대왕비(七大王妃)요 백자천손(百子千孫) 문누과(文武科)를 대대로 날것이니 저마다 얻을소냐. 주인봉을 자세히 보니 목토산(木土山)의 혁괘(革卦)로다.

독령치(禿岺峙)를 넘어서니 와우형(臥牛形)이 천기(天基)로다. 대해수(大海水)가 조당(朝堂)하니 인재부고(人才富庫) 나겠구나. 오백년이 지나가면 명현군자(明賢君子) 나리로다. 병정방(丙丁方)이 과고(濄高) 하니 대대 인물 불절(不絶) 하리. 화개금성(華蓋金星) 주인봉은 오성구발(五姓俱潑) 하리로다.

▲1915년대 교촌리 전경(안중식 그림 부분)

곧올재 전설

교촌 북동쪽에서 연성리로 넘어가는 전설이 남아있는 고갯길로 영광팔경(고현초적 古峴樵笛)의 하나이다. 곧올재에서 나뭇꾼들이 쉬면서 보리·버들피리를 불며 소고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등 다채로운 놀이를 했다. 이들의 노는 모습이 아름다워 ‘고현초적’이라 칭하고 영광팔경의 하나로 삼았다. 이 고개의 이름은 「읍지」 등 문헌에 고치 또는 고도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한시대 50여 부족국가 간에는 싸움이 자주 있었다. 영광고을을 중심으로 있던 나라는 성진이었다. 이 고을에 금실이 좋은 젊은 도손부부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의 부인이 산기(剷氣)가 있던 어느 날 이웃 부족들이 이 고을을 쳐들어 왔다. 군사들이 싸우는 동안 마을사람들은 고치를 넘어 태청산(太凊山)으로 피난을 갔다. 도손은 만삭의 부인을 등에 들쳐 업고 피난을 나섰다. 그러나 만삭의 부인을 업고 피난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인을 등에 업고 고개를 넘던 순간, 부인이 곧 아기를 낳을 듯 심한 진통을 했다. 드디어 이 고개에서 아기를 낳고 말았다. 아기를 낳을 날이 차지 않았건만 전쟁의 충격 때문에 조산을 하고 만 것이다.

아기를 받아 본 일이 없는 도손은 당황하기만 하였다. 혼수상태에 빠진 부인은 물을 찾고 있었다. 도손은 물을 가져와야 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본체만체 피난길을 재촉해 갔다. 어찌할 줄 모르던 도손은 적진이 되고만 고을을 향해 뛰어 갔다. ‘곧올게, 조금만 참고 있어’라고 하면서 도손은 부인과 아기에게 필요한 도구와 약이 급했던 것이다.

집을 향해 뛰던 그는 적들에게 붙잡혔다. ‘너 이놈! 왠놈이냐’ 도손은 피난길에 오른 이유와 그의 부인의 급한 사정을 얘기했다. 그러나 적병들은 ‘이놈이 첩자임에 틀림없다’면서 모진 매를 때렸다. 도손은 첩자가 아니라 위급한 부인을 구하러 왔노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그를 죽였다. 도손은 죽으면서 고을 북동쪽 고개를 향해 손을 허우적이며 ‘곧 갈게’를 수없이 부르다 숨을 거두었다.

돌보는 이 없이 산길에서 아기를 낳은 도손의 부인도 도손을 부르며 죽어갔다.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왔다. 금실 좋았던 부인과 아이는 산마루에서, 남편은 산 아래에서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도손이 고을을 향해 뛰어 가면서 ‘곧 올게 조금만 참아’하고 소리쳤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이 고개 마루에 이들 부부를 묻으며 ‘곧 올께’를 되풀이 했다. 이후부터 이 고개 이름이 ‘곧올재’가 되었다.

인구의 변화

예부터 이 지역은 살기 좋은 고장으로 이름난 옥당(玉堂)고을 영광이란 별칭과 함께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이라 한 것은 호수와 인구가 다른 고을에 비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광의 호수(戶數)와 인구에 대해서는 다른 고을에서는 아예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담긴 별칭으로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영광지역은 지리적으로 남부 서해안을 끼고 산악, 구릉산지와 평야지대가 골고루 분포한 지역으로서 별다른 산업시설 없이 농경생활을 바탕으로 농업인구가 대부분이었던 고장이다. 1925년과 1928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구가 감소했다. 그 원인은 백수평야(白袖平野)의 영광수리시설(靈光水利) 착공을 위해 노동자(일본인·중국인 포함)가 거주했다가 떠났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영광군의 면적은 553.486km²로 토지용도별 비율을 보면 비도시지역이 92%, 도시지역이 8%이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말의 인구수, 1933년 3월말의 호수와 직업별 인구수는 다음과 같다.

인구증감은 1925년 80,502명(한국인 : 78,667명, 일본인 : 940명, 중국인 : 895명), 1928년 80,265명(한국인 : 79,298명, 일본인 873명, 중국인 : 94명)을 기점으로 일제강점기와 1945년에는 135,949명, 1960년에는 142,505명, 1963년에는 152,490명, 1965년에는 160,784명으로 계속 증가하다 1968년과 1969년에 163,240명으로 인구가 최고수준에 도달하였다. 이 시기에 이처럼 농촌인구가 급증한 것은 정부가 기초산업인 농업을 중시하여 중점 개발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사상 유례가 없이 농촌의 땅값이 오르고 곡가도 크게 높아졌다.

영광군은 전국 139개 군 가운데 인구 밀집지역에 속하면서도 인구 감소율이 비교적 높은 지역에 속한다. 먼저 가구 수를 살펴보면 1957년 19,839가구에서 1961년에는 24,944가구로 증가하였고 1966년에는 26,436가구까지 증가하였다. 그 후 도시화 및 공업화정책의 추진으로 계속 감소하다가 1976년 24,924가구까지 줄어들었다. 그 후 큼 변동이 없다가 1990년대에 와서 23,832가구로 감소하였고 다시 2000년에는 25,850가구이던 것이 2006년에는 24,991가구로 약간 하락하였다.

또한 1m²당 인구밀도를 살펴보면 1958년 303명에서 1969년에 359.2명으로 가장 높았고 그 후 지속적으로 가구당 인구수가 낮아지고 있다.

이와 같이 해마다 인구가 감소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육이나 취업 등을 통해 이촌향도하는 도시화 때문이다.

영광군(읍)을 소개하려고 하니 신문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각 지역별 특성과 전설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책 ‘사라지는 것들에 기대다’(광주모노그래프 02, 오래된 가게) 207p에 실린 한재섭님의 ‘오래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중에 “사진도 사랑도 조심히 다룰 수 없다. 다룬다는 말 자체가 사랑과 사진을 성립불가능하게 만든다. 조심히는 할 수 있다. 사랑도 사진도. 그렇다고 사랑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도 완벽하게 사진가의 의도대로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다”고 말씀한 것처럼 이 지면에 영광군의 모든 역사를 함축적으로 담아낼 수는 없었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영광군은 천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고장이다.

▲안중식의 영광풍경

유창수 기자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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