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남 前 광주일보 편집국장

노트북 컴퓨터 화면이 갑자기 흐려졌다. 껐다 다시 켜도 바탕화면조차 제대로 뜨지 않는다. 부팅하는데만 몇 분씩이나 걸리던 며칠 전부터 낌새가 안 좋았다. A/S 센터를 찾았다. 5년 전에는 데이터 저장용량이 적다고 노트북을 새 걸로 바꾸라고 했다. 이번엔 처리 속도가 늦어져 SSD(디지털정보 저장장치)를 바꿔야 한다는 진단이다. 사실 책을 수만 권 쌓아두고 있더라도, 필요한 자료를 제때제때 읽어내지 못하면 수만 권 책은 그냥 짐 더미일 뿐이다.

노트북 컴퓨터는 도서관이자 세계를 향한 창구다. 노트북이 먹통이 되면 세계를 바라보는 창도 닫힌다. 새 SSD를 끼우자, 클릭 한 번에 바탕화면이 환하게 떠오른다. 그동안 버벅거리던 인터넷 책방도 번개처럼 올라온다. 하드웨어 단계를 높인 김에 소프트웨어도 ’ᄒᆞᆫ글 2020‘ 최신판으로 업그레이드했다. 무슨 단어든지 터치 한 번 하면 명쾌한 해석이 나온다. 수십 개 사전이 여의봉처럼 손안에 들어있는 느낌이다.

노트북만 있으면 카페 한구석에 앉아 책도 읽고 드라마도 보고 글도 쓰는 시대다. 디지털 노마드가 신인류로 추앙받는 시대, 디지털 세상을 실감한다. 디지털기술이 이렇게 발전했는데 세상은 왜 유토피아가 되지 못할까? 의문이 생긴다. ‘정보는 힘이자 돈’이다. 디지털 세상에선 누구나 정보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은 ‘부의 양극화, 권력의 편중화, 불공평 불공정 사회’가 더 심화되었다고 아우성이다.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그린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세계적 열풍을 받고 있다. 넷플릭스를 볼 수 있는 83개국에서 모두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넷플릭스가 불법인 중국에서도 1억 명 이상이 접속했다. 영국 BBC는 그 인기비결을 ’불평등한 사회와 다르게 페어플레이에 바탕을 둔 대안세계를 보여준 때문’으로 풀이했다. 2년 전 아카데미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도 불평등사회를 고발한 작품이다.

불평등사회에 대한 불만이 부와 권력 편중화를 비난하는 단계를 넘어 이제 페어플레이가 아닌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분노로 번지고 있다는 증거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분노는 인륜은 뒷전으로 하고 이윤만을 목표로 삼고 있는 문명사회에 대한 분노가 그 근원이다. 그러나 서바이벌 게임이나 드라마가 아닌 현실사회에서 ‘페어플레이를 바탕으로 한 대안세계’는 가능할까.

조지오웰은 <동물농장>을 1945년에 썼다. 계급사회를 무너뜨리면 모두가 평등을 누리는 유토피아 세상이 온다는 꿈이 얼마나 허황한지 보여주는 풍자소설이다. 평등사회 유토피아를 내걸었던 혁명가들은 권력을 잡자 권력에 중독되어 오히려 디스토피아 세상을 펼치다 몰락한다. 한쪽으로 쏠리는 이념이나 신념이 세계를 극도로 불평등하게 만드는 이 이야기는 50년 후 실제 현실이 되어 눈앞에 드러났다.

세계석학 유발하라리는 올해, ‘코로나 이후 빅 브라더가 등장할 것‘이라고 디스토피아 세상을 경고했다. 조지오웰은 1949년에 <1984>에서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미래세상‘을 그렸다. 집 안에까지 텔리스크린, 마이크로 폰을 설치해 ’자유로운 생각을 범죄화‘하며 억눌러 지배하는 감시사회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17일 ’오징어 게임은 한국사회가 품고 있는 잔혹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금 한국은 제대로 디지털 세상을 살고 있나? 한국은 디지털 최강국이다. 인터넷 망, 인프라 설치, 인터넷 접속시간, 사용률 등 모두 세계 최고다. 그런데 디지털정보 파악능력은 최하위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 편향주의 때문이다. 아무리 빨리 가는 기술이 나오더라도 방향을 잘못잡으면 목표에서 오히려 빨리 멀어진다.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이 문제다.

검색창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치자 수많은 사례가 올라온다. 기울어진 아래쪽 운동장에서 위쪽으로 올라선 한국인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김종남 前 광주일보 편집국장(언론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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