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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의 역사] 제17화 독립지사 고송(杲松) 고경진(高暻鎭)
법성문화진흥원 | 승인 2022.04.19 16:46 |

박경원 장관의 공적비 앞, 길 건너 잘 지어진 집(종합안내판 색인번호 ⑦번)이 고송 고경진 선생의 생가 터이다.

이 사진은 발막리 영모재 모습인데, 법성포노인당과 꼭 같은 모양이다, 구조도 똑 같은 4칸이었다. <사진출처=법경헌>
법성진길 15번지, 옛 노인당 자리에 신축된 집이다. 고경진 선생의 생가였던 법성노인당의 건물과 토지는 영광 갑부 조희경이 소유하다가 1927년에 법성포노인회에서 사들여 개축하고 58년동안 노인당으로 자리하다가 법성포여자노인회에 매각하고 1985년에 인의산 와우정 아래에 새 터를 잡아 신축 이전하였다. <NAVER 거리뷰 화면 캡쳐>

선생은 일본의 마각이 들어 나고, 수구로 일관한 유교 세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던 1889년(고종 26)에 법성진의 8파총 가운데 한 분인 고시은 파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보명은 덕진이며 자는 경진이다. 본관은 장흥이며, 호는 고송, 야인(野人)이다.

고경진 선생 문적-고덕진 자 경진 호 야인 장흥인 제봉 경명 후 <사진출처=법경헌>

「법성향지」에는 조선 후기, 법성진에 8파총이 재임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파총’이란 종4품 벼슬로 품계는 영광군수와 같지만 격이나 예우는 영광군수에 비할 수 없는 무관직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법성진진지」에 1895년 현재, 첨사 1명에 장교 9명이 있다 고 기록되어 있어, 「법성향지」의 8파총은 「법성진진지」에 기록되어 있는 군관(장교)를 말한것 같다.

1863년(철종 14) 3월에 법성 첨사가 발급한 군관임명장이다. 진내리 최훈창가 소장 <사진출처=법경헌>

선생은 “애국이란 나라와 동포를 위하여 자기를 버려야하고 돈보다 목적을 위하여 활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법호견문기」 신명희 (1985년) 39쪽

선생이 초학을 거쳐 경서를 통독하던 1905년에 일본은 무단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기 위한 전 단계로 조선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전국 각처에서 외세를 배척하고 국권을 회복하자고 의병들이 봉기하였고, 한편에서는 교육만이 나라의 근대화를 촉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자각하고, 경향각처에서 학교가 설립되었다.

법성에서도 영광군 최초로 1906년에 ‘법성사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고, 선생도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조선신사보감」, 「대한매일신보」 감수성이 예민할 시기인 선생의 나이 열일곱 살 때 일이다.

‘법성유교 3학년 우등 고경진’

●법성유교 영광군 법성학교 교감 이화복 총무 이장섭 사무원 전명욱 장형선 교사 최한주 등 여러 사람이 열심히 교육하여 겨울시험을 실시하였는데 3학년 최우등은 나계형, 우등은 신진익 고경진이었고, 2학년 최우등은 고우진, 우등은 김승석 김정섭, 1학년 최우등은 김대자, 우등은 장행무 김규하라고 한다. 【원문】●法聖有校 靈光郡 法聖학校 校監 李華馥 總務 李章燮 事務員 全明旭 張亨善 敎師 崔漢柱 諸氏가 熱心敎育하야 冬期試驗을 經하얏는대 三年級 最優等 羅啓炯 優等 申鎭翼 高경鎭 二年級 最優等 高又鎭 優等 金承石 金正셥 壹年級 最優等 金大者 優等 張幸武 金圭厦 等이라더라. 『대한매일신보』1909년 1월 31일자 2면 5단 기사

1907년 어느 날, ‘법성사립보통학교’ 교문에는 전라남도에서 일본 고위 관리가 온다고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 게양되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 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선생은 이 광경을 보고 어이가 없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일장기를 뽑아 땅바닥에 놓고 밟아 찢으려다 안 찢어지자 내 동댕이쳐 버렸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광경을 본 일본인들은 아연실색하였고, 선생은 산으로 도주해 버렸습니다.

이 사건이 선생의 나이 열여덟 살 때 일입니다.

「법호견문기」, 「장흥고씨 문적」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곤욕을 치루고 난 선생은 서울에서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던 최한주 선생의 주선으로 평양 대성학원으로 유학길에 나섰다.

선생이 평양에서 학업을 마치고 1913년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학교 형편은 열악한 재정으로 운영이 어려워 최한주 선생은 학교를 떠났고, 후임으로 서울에서 초빙했던 평양 대성학원 동문인 계희선 선생마저 학교를 떠난 후였다.

그래서 고심 끝에 동기생인 나계형 선생과 함께 직접 교단에 섰고, 학교 재건에 앞장서 집안일은 팽개친 채 학교에서 기숙하며 학교일에만 온 정성을 다했다.

“고경진은 不顧家事하고(가정은 돌보지 않고) 학교에 전념하니 家勢(집안 살림)는 漸衰하고(점점 기울러 가고) 零落하여(살림은 줄어들어) 문자 그대로 家屋이 倒壞되어(사는 집도 팔게 되어) 후에 노인당을 更築하였다.”(개수하여 노인당이 되었다.)

「법호견문기」

학교는 다행히 선생의 노력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었는데, 이 즈음에 서울 휘문고보에 다니던 신명희 선생이 귀향하여 서울의 3.1 운동 소식을 전했다. 신명희 선생은 진내리 박명서 사랑채에서 보통학교 학생들과 3.1운동을 모의하였는데,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법성포’의 3.1운동은 미수에 그쳤고, 학교 재학생 10여 명이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목포검사국으로 끌려가 구속되었다. 「매일신보」

죽을힘을 다했던 학교도 이 여파로 직격탄을 맞았다. 선생도 3.1운동의 여파로 고향을 떠나 1920년 5월에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군자금 모집책으로 국내외에서 활동하였다. 「재판기록」

그사이 가솔들은 극도의 빈곤에 빠지게 되었고, ‘불갑에서 공사판이 벌어졌다’는 소문 따라, 1924년에 불갑면 녹사리로 이주하여 저수지 공사 현장에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며 일경의 감시아래 선생을 잊어야 했고 선생 역시 집안일은 물론 처자까지 머리에서 지워 버려야 할 아픔을 이겨내야 했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다가 지치고 지쳐 병든 몸으로 동지들의 부축을 받아 선생이 자기 집이라고 왔을 때는 이미 혼수상태가 되어 자기 집이 토담집인지 자기부인이 얼마나 늙었는지 아들이 얼마나 장성하였는지 조차도 몰랐고, 조국광복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42년, 쉰셋을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옥당골의 전통문화」 영광군(1983년)

제18화 하동문 길의 무장 70척, 성돌

공적비군의 박경원 장관비 앞, 싱글지붕의 집터가 법성포 옛 노인당 터다. <사진출처=법경헌>

법성포 옛 노인당을 앞을 지나 법성포역사문화탐방길 종합안내판에 이르러 하동문으로 가는 방향표시판을 따라 가다 보면 돌담에 음각으로 ‘무장 70척’이라 새겨 놓은 성 돌과 루문의 주춧돌로 보이는 큰 돌들이 있다.

하동문 초입 종합안내판 옆 하동문과 마당거리 방향안내 표시판을 따라 가야한다. <사진출처=법경헌>
하동문.마당거리 방향표지판 <사진출처=법경헌>
<사진출처=법경헌>
작청 터, 객사 터, 동조정 터 라고 써 있는 표지판 안내대로 50미터 정도 돌담길을 걸어가면 돌담 하단부에 무장70척 성돌이 보인다.필자가 10여년 전에 처음 발견하였다. <사진출처=법경헌>
무장칠십척(茂長七十尺) 성 돌 <사진출처=법경헌>

그동안 법성진성을 문화사적으로 지정하기 위한 영광군의 용역수행 과정에서 이 성 돌과 주춧돌에 관해 문의하신 학계 인사는 없었다.

다른 곳에서 옮겨왔을 것으로 추리할 수도 있었겠으나, 필자가 주목하는 대목은 ‘무장 70척’ 성돌이 1807년(순조 7) 엄동설한에 있었던 법성진 화재와 관련된 성 돌로 보이는 점이다.

법성진은 이때 관아와 조운선 집물고, 그리고 민가 5백여 호 가운데 4백여 호가 불타, 전라도와 영광, 무장 등 인근 고을의 도움으로 고을을 복구하였다. 「 승정원일기」, 「 비변사등록」

화재 복구 후, 법성진은 동내, 창문, 치리, 외치리, 토병리라 하였던 마을을 상리, 중리, 하리로 재편하였다. 「호구총수」, 「호구단자」

특히 1800년 이전의 법성진 고지도에는 성문이 모두 두 개로 표시되어 있는데 반해, 화재복구 후 제작된 고지도에는 성문이 4개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또, 영조때 발간된 「여지도서」(1757~1764년)에는 법성진성의 절반정도가 파괴된 상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을 조합하면, 이 탐방길에 있는 '무장 70척' 성돌하나가 순조 7년 대화재 후 법성진성의 변화된 모습을 단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될런지도 모른다.

왜 모든 사서에는 법성진성의 규모가 둘레 1,688척, 높이 12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법성진진지」(1895년)만 포백척 기준 둘레 3,062척, 높이 8척 7촌이라 하였는지? 그 단서가 이 성돌에 있를 지도 모른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1800년 이전의 해동지도, 광여도, 비변사인방안지도, 지승, 호남지도 등에는 법성진성의 성문이 하동문과 남문만 보인다.
「법성진진지도」 (1872) 규장각 소장
「법성진진지도」(1872) 가운데 관아부분을 확대한 지도다. 성문이, 상,하동문과 남문, 서문으로 4개가 색인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 지도

법성문화진흥원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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