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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의 역사] 제18화 하동문 길의 무장 70척, 성돌
법성문화진흥원 | 승인 2022.05.03 14:09 |
공적비군의 박경원 장관비 앞, 싱글지붕의 집터가 법성포 옛 노인당 터다. 사진출처=법경헌

법성포 옛 노인당을 앞을 지나 법성포역사문화탐방길 종합안내판에 이르러 하동문으로 가는 방향표시판을 따라 가다 보면 돌담에 음각으로 ‘무장 70척’이라 새겨 놓은 성 돌과 루문의 주춧돌로 보이는 큰 돌들이 있다.

하동문 초입-종합안내판 옆 하동문과 마당거리 방향안내 표시판을 따라 가야한다. 사진출처=법경헌
하동문/마당거리 방향표지판 사진출처-법경헌

사진출처=법경헌

작청 터, 객사 터, 동조정 터 라고 써 있는 표지판 안내대로 50미터 정도 돌담길을 걸어가면 돌담 하단부에 무장70척 성돌이 보인다.필자가 10여년 전에 처음 발견하였다. 사진출처=법경헌
참고 자료 사진
무장칠십척(茂長七十尺) 성 돌 사진출처=법경헌

그동안 법성진성을 문화사적으로 지정하기 위한 영광군의 용역수행 과정에서 이 성 돌과 주춧돌에 관해 문의하신 학계 인사는 없었다.

다른 곳에서 옮겨왔을 것으로 추리할 수도 있었겠으나, 필자가 주목하는 대목은 ‘무장 70척’ 성돌이 1807년(순조 7) 엄동설한에 있었던 법성진 화재와 관련된 성 돌로 보이는 점이다.

법성진은 이때 관아와 조운선 집물고, 그리고 민가 5백여 호 가운데 4백여 호가 불타, 전라도와 영광, 무장 등 인근 고을의 도움으로 고을을 복구하였었다. 「 승정원일기」, 「 비변사등록」

화재 복구 후, 법성진은 동내, 창문, 치리, 외치리, 토병리라 하였던 마을을 상리, 중리, 하리로 재편하였다, 「호구총수」, 「호구단자」

특히 1800년 이전의 법성진 고지도에는 성문이 모두 두 개로 표시되어 있는데 반해, 화재복구 후 제작된 고지도에는 성문이 4개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또, 영조때 발간된 「여지도서」(1757~1764년)에는 법성진성의 절반정도가 파괴된 상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을 조합하면, 이 탐방길에 있는 '무장 70척' 성돌하나가 순조 7년 대화재 후 법성진성의 변화된 모습을 단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될런지도 모른다.

왜 모든 사서에는 법성진성의 규모가 둘레 1,688척, 높이 12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법성진진지」(1895년)만 포백척 기준 둘레 3,062척, 높이 8척 7촌이라 하였는지? 그 단서가 이 성돌에 있을 지도 모른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1800년 이전의 해동지도, 광여도, 비변사인방안지도, 지승, 호남지도 등에는 법성진성의 성문이 하동문과 남문만 보인다.
「법성진진지도」 (1872) 규장각 소장
「법성진진지도」(1872) 가운데 관아부분을 확대한 지도다. 성문이, 상,하동문과 남문, 서문으로 4개가 색인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 지도

[법성의 역사] 제19화 법성포 내 최초의 예배당 터

‘무장 70척’ 성 돌이 있는 지역은 조선시대 법성진 ‘문루’가 있었던 지역이다. 루문샘이 이 루문에서 연유되어 불러온 이름이고,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시말 떡집이 있었다.

시말 떡집=시말은 3말의 사투리고, 떡이란 댁(宅)의 사투리다. 시 말 떡집이란 이 두말을 합한 세말 댁의 집이란 뜻이다. 옛날에는 외지에서 시집온 아낙네의 고향 뒤에 떡을 붙여 "oo떡"이라고 불렀다. 시말떡집은 일제강점기에 유명했던 법성 토종을 만들었던 집(술도가)이다. 법성 토종은 줄여서 토종이라고 도 했는데 알코올 도수가 아주 높은 소주다. 매일 술을 빚어 넣는데 그 량이 세(3)말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시말 떡집 옆이 일제강점기에 종루가 있었던 초가집 교회 자리이다. 법성포내에 처음 생긴 예배당 자리이다. 8.15와 6.25때 종루의 종이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예배당이다.

법성 고을의 기독교사는 1906년에 성결교가 서문거리 송원길 가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머물며 잠시 포교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법호견문기), 그리고 1915년에 남장로교가 성재동에 자리를 잡고 학교(대성학원)를 운영하며 법성 고을에 기독교가 비로서 자리하게 된다.

성결교가 들어오기는 1906년경이다. 휴란스 신부가 오고, 장로인지 집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송 씨란 분이 같이 왔다. 송 씨는 금은세공을 업으로 하고 그 아들 송원길은 나와 같이 김학서당에서 유학(遊學) 했다.(※ 놀았다.) 신부는 매일 같이 대청에서 왔다 갔다 건달배 생활하는듯하였고, 누가복음, 마태복음, 고린도전서 등의 소책자를 무상으로 일반인에게 배부하였다. 신도는 누구인지, 몇 명이나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몇 해후(1910년)에 떠나 버리고, 또, 몇 해 후에 다른 신부가 1913년경에 왔으나, 그 후의 일은 알 수 없다.

「법호 견문기」 신명희(1985년) 종교 편

1920년에 법성리 조덕연 가에 모여 예배를 시작한 법성포 내사람들은 1923년에, 위에 소개한 시말떡집 옆에 초가 한채를 사들여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여자 성인을 대상으로 숙명여자학원이 이 예배당과 청년회관을 이용하여 야학을 운영하며 문명퇴치와 미신타파,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여름성경학교를 운영하였다.

포 내 최초 예배터 1915년에 제작된 지적도로 법성리 768번지 조덕연 집사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하였다.
법성 포내 최초 교회 터 1923년부터 1953년까지, 30여 년간 '법성교회'가 자리하였던 곳이다.
법성교회(法聖敎會)의 하기(夏期) 아동학교(兒童學校) 전남 법성포(全南 法聖浦) 야소교(耶蘇敎)에서는 금월(今月) 8일(八日)부터 동(同) 교회당내(敎會堂內)에 하기아동학교(夏期兒童學校)를 개최(開催)한바 기한(期限)은 3주간(三週間)이오 선생(先生)은 김정실(金正實) 조윤순(趙允順) 외(外) 제씨(諸氏)며 과정(課程)은 작문(作文), 성경(聖經), 위생(衛生), 고적(古蹟), 아동(童話) 외(外) 아동(兒童)에게 취미(趣味)잇는 과정(課程)을 교수(敎授)한다는데 첫날부터 모인 아동수(兒童數)가 70명(七十名)이나 된다더라.【법성(法聖)】『중외일보』제272호 1927년 8월 13일자 4면 6단 기사

[법성의 역사] 제20화 ‘청년회관과 법성포 덤벼라축구팀’

‘무장 70척’ 성 돌을 지나 3거리에 이르면 관아 안내 방향 표지판에 이른다.

이 방향 표지판 앞이 조선시대 작청 터며 3.1운동 직전인 1918년에 법성포청년회가 창립하여 신문화운동을 펼쳐나가며 법성의 구시대 역사, 교육, 문화 등을 신시대로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법성 문화의 요람이자 기념비적인 장소이다. 「법성진진지도」, 「지적도」(1915년), 「동아일보」

이곳이 지금은 흔적 하나 없이 변했지만 조선시대 이 일대는 법성진 관아가 밀집되어 있던 곳이다. 법성진의 특징은 앞글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다른 지역의 성과 달리 성의 정문이 남문이 아니고, 하동문이란 점과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법성진과 법성창이 구획되어 있는 점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 있는 관아는 무기고를 제외하고 대부분 조창 이외의 시설이 자리하였다.

법성포에는 법성진의 유적이라고 해 봐야 법성진성과 법성 첨사들의 선정비뿐이다. 그래서 법성포역사문화탐방길이 황량한 감마저 든다. 조선 시대 법성진의 위상에 걸맞게 이와 같은 해설판 하나라도 고풍스럽게 자리하였으면 좋겠다. 이게 나만의 생각일까?

1897년에 지도군이 새로 생겨 법성진의 동헌 등 관아 건물이 모두 헐려 지도로 실려갔다. 「독립신문」 , 「황성신문」 그런데 이곳에 있던 형방청 건물은 도존위 사무실로 남아 있었다. 법성포 청년들은 이 건물과 법성 교회 예배당을 이용하여 구습 타파, 청년야학교, 여자야학원, 신문열람소, 신파 연극, 음악, 축구, 야구 등 체육활동을 하였다. 「동아일보」,

이 당시 법성포에는 요즘과 같은 초등학교가 생긴지는 10년여 년이 되었지만 학비가 없어 학교를 다니는 학생 수보다 다니지 않은 학생 수가 훨씬 많았다"고 한다. 옛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한달 월사금이 그때 돈으로 20전 이었고, 형제 둘이나 셋이 학교에 다니면 나머지 학생은 10전이었다. 즉, 둘이 다니면 30전, 셋이 다니면 40전이었다. 그래서 배우지 못하고 나이들어 버린 청장년들이 수룩하였다"고 한다. 남자들이 이러했으니 여자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겠다. 당시에 여자를 학교에 보내는 가정은 거의 없었다.

세태가 이러하니 청년야학교와 여자야학교의 인기는 대단했었다. 특히 여자 야학교는 평양에서 여자 선생님을 모셔다 가르쳤으니 법성포청년회의 열의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별도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법성포청년들의 열의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남궁현, 신명희, 두 분 선생님이 청년회를 주도하며 글자를 터득토록하였고, 연극과 음악 동아리를 만들어 위도까지 원정 공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법성 소년단과 인의단을 중심으로 '법성포 덤벼라 축구팀'을 창단하여 여러 경기에 출전하여 우승을 거머쥐었고, 대단한 인기몰이를 하였다. 특히, 법성소년단과 인의단은 서로 번갈라가며 호남축구대회를 4차례나 개최하였다. 「동아일보」

제3회 전 영광 축구 대회가 지난 7월 31일 오전 10시부터 영광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찌는듯한 더위를 무릅쓰고 천여 관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조희권, 조용헌 두 사람이 교대로 주심을 맡아 영광 농보군 팀과 법성 덤벼라 팀이 접전을 벌여 4차례나 연장전을 치르고 법성 덤벼라 팀이 결승에 진출하였다. 다음 달에 목포에서 개최되는 호남 축구 대회에 출전하게되는 영광군 대표팀인 청맹 정지군 팀과 결승전을 치른 법성 덤벼라팀은 9대영이라는 『대 스코어』로 우승을 놓쳤으나 관중들은 법성 덤벼라 팀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일각까지 분전한 법성덤벼라팀이 보여준 운동가적 정신에 많은 찬사를 보냈다 한다. 저녁 8시에 대회를 마쳤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3일 자 4면 7단 기사 요약

하기 휴가(夏期休暇)를 이용(利用) 귀성(歸省) 학생(學生)들의 활동(活動) 영광(靈光) 기보(旣報) 한 바 재경(在京) 영광 유학생회(靈光留學生會) 주최(主催) 본보(本報) 영광 지국(靈光支局) 후원 하(後援下)의 제3회(第三回) 전 영광 축구 대회(全靈光蹴球大會)는 지난 7월(七月) 31일(三十一日) 오전(午前) 10시(十時)부터 당지(當地) 공 보교(公普校) 구장(球場)에서 열었는데 폭염(暴炎)을 무릅쓰고 운집(雲集) 한 천여(千餘) 관중(觀衆)이 입성(人城)을 일운 속에 동(同) 유학생회(留學生會) 회장(會長) 주철환 씨(曹哲煥氏) 사회(司會)로 참가(參加) 한 7개 단체(七個團體) 근(近) 백 명(百名) 선수(選手)들의 작업(莊嚴) 한 입장식(入場式)을 행(行) 하고 조화권(曹喜灌), 조용헌(曹泳憲) 양 씨(兩氏)의 교대(交代) 주심 하(主審 下)에 혈용육약(血湧肉躍)의 경기(競技)는 진행(進行) 되어 동일(同日) 하오(下午) 8시경(八時頃)에 공전(空前)의 성황(盛況)으로 원만(圓滿) 히 대회(大會)를 마치었다는 바 각단(各團)의 묘기(妙技)는 실(實)로 막상막하(莫上莫下) 하야 농본 군(農補軍) 대(對_ 법성(法聖) 덤벼라 단(團)이 접전(接戰)과 여(如) 함에는 연장 잔(延長戰)이 4회(四回)에까지 지(至) 한 백열(白熱)을 정(呈)하얏스며 금월 중(今月中) 개최(開催) 되는 목포(木浦)의 호남 축구 대회(湖南蹴球大會)에 출전(出場) 할 『팀』인 청맹 정지 군(靑盟定支軍)은 사계(斯界)에 그 만한 중망(重望)이 잇는 만큼 시종(始終) 압도적(壓倒的) 기세(氣勢)로 최후(最後)의 결승(決勝)에 니르러 법성(法聖) 덤벼라 단(團)과 겨누자 9대영(九對零)이라는 『대 스코어』로 우승(優勝)을 독점(獨占)하얏는데 일방(一方) 법상 군(法聖軍)도 그러한 참패(慘敗)에 불굴(不屈) 하고 최후일각(最後一刻 까) 지 분전(奮戰) 하야 충분(充分) 한 온 동기적(運動家的) 정신(情神)을 끝끝내 보유(保有)하얏슴으로 관중(觀衆)의 호평(好評)을 어 덧다더라.【영광(靈光)】『동아일보』제2852호 1928년 8월 3일 자 4면 7단 기사

일제강점기 청년회관이 자리했던 조선시대 작청 터가 지금도 '청년터' , '청년터껏' 또는 '청년마당'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이 일대와 동헌 터 일대가 꽤 넓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법성포청년회'가 처음에는 '법성포운동회'로 발족하여 서울유학생들이 서양스포츠인 축구, 야구을 보급하면서 지역사회 근간으로 활발히 청년활동을 전개하였었다.

이렇게 활발했던 '법성포청년회'는 1927년에 신명희 선생이 동경 유학길에 오르고, 남궁현 선생도 이 시기부터 일제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되면서 구심점을 잃게 된다. 그리고 1932년에 일제경찰의 사회단체 해산령으로 크게 위축되었다가 1935년에 '법성가'를 작사하신 나계형 선생을 주축으로 법성포에 거주하는 일본사람들과 친목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법성포체육회'를 결성하고 제1회 수영대회를 여는 등 스포츠를 통한 청년활동을 계속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영광체육단사건'으로 맥이 끊겼다. 1945년 광복후에는 서로 나뉘어 대립하였고, 한청이다, 반공청년단이다 등으로 흑역사를 이어야 했다.

1935년에 개최된 제1회 법성포 수영대회에 참가하여 수상하신 분들의 함자가 수록된 『조선중앙일보』 기사다.

법성이 고향이신분들은 여러분들 선대의 함자가 있을지 모른다.

『조선중앙일보』 제2660호 1935년 8월 2일자 3면 1단 기사

법성포 수상경기(法聖浦 水上競技) 【영광(靈光)】 전남(全南) 영광군(靈光郡) 법성포(法聖浦) 수상경기대회(水上競技大會)는 예정(豫定)과 가티 지난 7월(七月) 28일(二十八日) 오전(午前) 11시(十一時) 반(半)에 본회(本會) 회장(會長) 나계형 씨(羅啓炯氏) 사회 하(司會下)에 개막(開幕)하고 관중(觀衆) 2천여 명(二千餘名)의 대성황리(大盛況裡)에 동일(同日) 오후(午後) 4시(四時) 반(半) 경기(競技)를 무사(無事)히 폐막(閉幕)하얏다는데 경기(競技)의 경과(經過)는 다음과 갓다한다. ▲백미 평형(百米 平泳) 결승(決勝) 1.감사차(金四次), 2.김문기(金文基), 3.박순(朴順) ▲뽀트-레쓰 결승(決勝) 1.김순용(金順用), 2.김소자(金少者), 3.강흥옥(姜興玉) 4.문두원(文斗元) ▲2백미 장애물(二百米 障碍物) 1.정중석(鄭重石), 2.강본삼길(岡本三吉), 3.김영철(金英喆), 4.나환중(羅桓仲), 5.신명철(申明哲), 6.남궁탄(南宮坦) ▲1천미 결승(一千米 決勝) 1.김사차(金四次), 2.이대률(李大律), 3.김문기(金文基), 4.산내(山內), 5.정중석(鄭重石), 6.강본삼길(岡本三吉) ▲2백미 자유형(二百米 自由型) 1.정중석(鄭重石), 2.김문기(金文基), 3.남궁○(南宮○), 4.김광엽(金光燁) ▲배영 결승(背泳 決勝) 1.나환중(羅桓仲), 2.이대률(李大律), 3.김사차(金四次), 4.김영철(金英喆)『조선중앙일보』제2660호 1935년 8월 2일자 3면 1단 기사

법성문화진흥원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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