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지] '고전적인 그 밤'

김미경 염산중학교 교사

“도착했습니다. 선생님! 내려오십시오.”

동창 모임에 선생님이 꼭 참석해야한다며 한 달 전부터 부탁을 해오던 제자가 집 앞에서 전화를 했다. 모임 장소로 직접 가겠다고 해도 기어이 옛 ‘은사님을 모시러’ 온 것이다.

나를 데리러 왔던 제자가 미리 연락을 했던지 십 수 명 제자들이 큰 절을 올리려는 듯 서 있다가 내가 그냥 자리에 앉자 죄송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 앉았다. 서로 자기소개를 했는데 몇은 확실히 알아보았고, 아쉽게도 몇은 기억이 가물거렸지만 30년이란 세월은 그 정도는 용서해도 좋을 너그러운 시간이 아닌가! 누구는 벌써 머리가 벗겨졌고, 누구는 손전화기 화면에 손주 사진을 넣은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으며, 중학생 때 모습이 여전히 남아 순하게 나이 든 절대 동안도 있었다. 건배사를 외치며 한 차례 술잔을 기울이더니 하나 둘 수줍은 듯 내 옆으로 와서 기억 저 편의 추억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난 것은 정확하게 36년 전이었다. 그때는 정말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그 가난이 결코 남루하지 않았으며, 그깟 빈곤쯤이야 근면과 성실로 얼마든지 채워 넣을 수 있는, 서로 의지하고 살던 시대이기도 했다. 나는 일 년 전에 그 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초짜 딱지는 면했지만 좌충우돌 열정은 여전했던지 국어교사라는 이름으로 매일 일기 검사를 했다.

한 학급에 70명이 다 되는 학생들의 일기를 어찌 다 읽을 수 있겠냐며, 일기 따윈 읽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그들의 일기를 모두 읽었다. 대신 모든 학생들의 일기 끝에 요즘말로 하자면 ‘댓글’ 아니, ‘덧글’을 서너 줄 씩 달아주었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의 일기를 읽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일기마다 뭐라 글을 써준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무모한 열정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초등학교 때 일기를 써왔던 덕인지, 그들의 일기 속에는 고단하고, 속상하고, 누추하기까지 한 삶이, 그러나 아이들의 고운 꿈과 희망 들이 아름답게 스며있었다. 나는 그 어린 학생들의 일기에서 위안을 받았으며, 무거운 책임감과 때론, 나를 단련하는 회초리의 아픔도 느끼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학교 운동부에 들어가서 그만두고 싶다며 매일 울던 범이, 가슴 설렌 풋사랑에 달뜬 일기를 썼다가 이별의 아픔에 수척해지던 선이, 남동생을 가르치기 위해 산업체 학교로 떠나야했던 순이, 가족의 갈등으로 차라리 고아가 되기를 바라던 자, 어른이 될 때까지 살 수 있을까 싶던 외소하고 병약했던 수, 학교 강당에 암막을 치고 영사기를 돌리면 화면에서 비가 내리던 단체영화, 300원의 관람비가 없어 몰래 돈을 줬던 철이, 교복대신 ‘기지’ 바지를 맞춰 입고 두발 단속에도 자신만의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던 기, 온갖 말썽과 주먹질로 매번 내 눈물을 빼던 신, 가르치는 기쁨을 안겨 주던 현, 그들은 삼십 년이 넘는 시간을 타고 이젠 그 때처럼 ‘해라체’를 쓰기도 미안한 중장년이 되어 나랑 같은 걱정을 하며 사는 동세대가 되어있었다.

뭉클한 마음으로 하나하나 눈인사를 나누던 중에 저쪽에서 ‘내가 선생님한테 엄청 맞았어요, 아마 수십 대 일걸요!’하는 소리가 들리자 다른 쪽에서는 ‘야, 그땐 다 맞고 컸어!’, ‘네가 매 맞았으니 사람 되었지’, ‘샘이 더 때렸어야 해, 그래야 진짜 사람되었지.’너스레를 떨었다. 가물거리던 기억이 이름 석 자와 매 맞은 이유를 듣자, 순간 머리를 딱, 치며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아, 너!’, ‘네, 맞습니다. 접니다. 선생님한테 진짜 많이 맞았어요, 그날은 소풍 끝나고 친구 집에 가서 애들하고 몰래 술 마신 걸 들켜가지고는 죽어라 맞았죠…….’

녀석은 그때, 주먹으로는 우리 학교에서 가장 센 놈이었다. 큰 키에 맷집도 좋아 중3때 이미 옆 고등학생들이 ‘짱’을 정할지 말지를 결정하려는 도전장을 받기도 했고, 겉멋에 겨운 어른 행동으로 위태롭기도 했으며, 꾸지람과 다독임으로 매일같이 내 애를 태웠는데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도 못가고, 거친 세상 속으로 일찍 발을 디뎌야했던, 나의 가장 근심스러운 제자였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늬들은 선행상 받아봤냐? 내가 이래봬도 졸업할 때 전교에서 딱 세 명에게 주는 선행상 받은 몸이야, 3년 동안 정말 좋은 쪽으로 변하고, 가장 어른스러워졌으므로 상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샘이 보장해주셔서 제가 선행상을 받았잖아요. 저, 선생님 안 잊고 살았습니다, 제가 큰 절 한 번 올리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꼭 큰 절 올리고 싶습니다.’

녀석이 일어나 넙죽 절을 올렸다. 급작스런 상황에 나도 맞절을 하고는 어깨를 두드리자 녀석이 나를 와락 붙잡으며 ‘감사합니다, 선생님!’을 되풀이하더니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는 그 뒤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자격도 땄고, 제가 힘들 때마다 늘 선생님 생각하면서 견뎠습니다. 사실 저를 못 알아보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 감사합니다. ‘중년의 소년’인 녀석의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사정없이 흘러내려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했다. 학년에서 제일 컸던 중학교 때와는 다르게 녀석의 어깨는 작고 야위어있었다.

다른 녀석들이 ‘야야, 그만해, 이젠 됐어. 좋은 날에 뭐냐? 일어나 임마!’ 퉁박을 주는 듯 했지만 그들 모두는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속에서 누군가를 기억하며 위안을 받아본 적이 있음을, 남들과 달리 쉽지 않은 인생 고비에서 다시 일어서 준 녀석이 얼마나 장한지를, 이렇듯 다시 만나 그때를 기억하며 울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나는 손수건을 꺼내 소년처럼 울고 있는 녀석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래, 너 잘 살아왔어, 그래서 고맙다. 내 눈 시울도 같이 붉어졌다.

고작 열 살밖에 차이나지 않던 풋내기 교사가 몇 십 년 연상인 듯 그들의 인생을 책임져보겠노라고 ‘무모한 도전’을 서슴지 않았던 일천구백팔십몇년들! 그때 나는 ‘교사는 10년 뒤의 사회에 봉사하는 직업’이라고 말하곤 했다. 당연히, 지금 당장의 변화가 어찌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그러면 그건 교사가 아닌 신(神)일 것이라고, 씁쓸한 위안도 했었다. 그런데 그 ‘십 년 뒤의 사회’라는 것이 몇 번을 되풀이한 지금, 나의 근심거리였고 나의 기쁨이기도 했으며 나의 사랑이었던 녀석들이 그 멀고 먼 약속을 이렇듯 귀하고 소박하게 지켜준 것이다.

아름다운 그 밤, 참으로 ‘고전적인 그 밤’을 다시 떠올려본다. 나는 오늘, 교사라는 이 ‘아름다운 벼슬’에 무한한 감사를 보내며, 너희들에게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그래, 나의 늙어버린 제자들아!

김미경 염산중학교 교사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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