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일 회사원

집에 와보니 사방에 벽 밖에 보이지 않는다. 집안 형편이 매우 가난함을 보여주는 상황을 말해준다. 이야기는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사마상여(司馬相如) 열전이다. 56만여 자의 방대한 내용 중에서 유일하게 러브스토리를 다루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사마상여는 촉군 성도출신으로 자는 장경(長卿)이다. 어려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칼싸움을 즐겨 배우니 그 부모는 견자(犬子)라고 불렀었다.

그는 공부를 마치자 완벽(完璧)의 주인공인 인상여(藺相如)를 롤 모델로 삼아 아예 이름을 상여라고 했다. 그래서 사마상여가 된 것이다. 한때 돈을 내고 낭이 되기도 했으며, 효경제를 섬겨 무기상시까지 올라갔으나 이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뒤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와 있을 때 임공의 현령 왕길(王吉)과 친분관계가 있었는데 왕길이 말하기를 “그대는 벼슬을 구하려고 오래도록 밖으로 돌았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제는 나에게 와서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 말을 듣고 사마상여는 그를 찾아가 도정(지금의 이장 격)에 머물렀다. 임공의 현령은 사마상여를 공경하는 척하며 날마다 문안하였다. 이때 그 지방의 대부호 탁왕손(卓王孫)이 연회를 열었는데 사마상여도 현령과 함께 참석했다. 사마상여는 거문고의 명인이었으므로 거문고를 연주하였다. 그런데 탁왕손 에게는 과부가 된지 얼마 안 된 젊은 과부 딸이 있었는데, 거문고 음악을 매우 좋아했었다.

그것을 미리 알고 사마상여는 현령과 짜고서 거문고 연주를 멋지게 뽑아 왕손의 딸 탁문군을 꾀어내려고 수작을 부렸던 것이다. 용모가 준수하고 거문고 또한 일품인 사마상여의 솜씨에 문군은 문틈으로 보고서 마음이 끌려 반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문군은 한편으로 상여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도 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상여일행은 사람을 시켜서 문군의 시종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 자기의 마음을 전하도록 했다.

문군은 상여와 마음이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고 그날 야밤에 둘이서 탁왕손의 집을 탈출하기에 이른다. 곧바로 상여의 옛집 성도에 와보니 그 집에 살림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네 벽 뿐(家徒四壁) 이었다. 문군은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탁왕손은 대로하며 말했다. “딸은 아무 쓸모가 없다. 차마 죽이지는 못하지만 재산은 한 푼도 나눠 줄 수 없다.” 주위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탁왕손을 달래보기도 했지만 그는 완고 하여 끝내 듣지 않았다.

너무 가난하여 문군이 가지고 왔던 패물을 모두 팔아 쓰고 나니 생계를 이어 나가기가 곤란했다. 하는 수 없이 문군은 상여와 상의하여 친정동네인 임공으로 돌아가 술집을 차려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탁왕손은 부끄러워 문을 걸어 닫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식 이길 부모 어디 있겠는가.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못이기는 척 받아들여 문군에게 노복 100명과 100만전의 돈 등 시집 갈 때 주려고 했던 모든 것을 나눠 주었다. 얼마 뒤 문군은 모든 것을 처분하여 사마상여의 고향 성도로 돌아가 밭과 논을 사서 부유하게 지낸다. 나중에 정권이 바뀌어서 무제가 들어서자 어려서 독서를 좋아했던 상여가 지은 자허부(子虛賦: 자허의 노래인데 정교한 문장이 무제를 감동시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그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큰 벼슬을 내린다.

이때부터 사마상여의 문학적재능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처음에는 마음만 서로 흠모하여 부모를 배반하고 도망하여 가난한 삶을 살았으나 나중에는 큰 벼슬까지 하며 살아간 사랑의 한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2,100여 년 전의 이야기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부모가 반대해도 떼어놓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경일 회사원 (대한시멘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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