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영광염산중학교 교사

시골 중학교 국어교사로 발령받은 것은 대학을 갓 졸업한 1981년의 일이었다. 3월 2일, 학교의 아침은 치마 정장 투피스로 견디기엔 추운 날씨였다. 게다가 교무실 조개탄 난로 옆 온기는 선배교사들의 몫이다. 발령장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초짜 교사가 감히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교생 실습 때 익힌 미흡한 실무 체험으로 5년쯤 근무한 교사처럼 척척 업무를 수행해야 했으며, 학창시절 바라던 교사상을 떠올려 그대로 담임 역할을 해내려고 고군분투해야했다. 마치 결혼과 동시에 아이가 생겨, 어설픈 육아로 급작스레 ‘어미’가 되어가듯, 준비할 겨를도 없이 ‘선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한 열정, 그러나 어설픈

3월 초순, 가정방문 첫 집에서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교무수첩에서 흰 봉투가 떨어졌다. 생활기록부 작성을 위해 받은 주민등록 등본이 담긴 봉투였다. 나는 굳이 그 봉투의 내용물을 끄집어내며 과장되게 외쳤다. ‘에구, 영숙이 주민등록등본인데 이게 떨어졌네!’ 생뚱맞은 내 행동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부모님의 시선에 뒤통수가 간지러워 쫒기 듯 학생 집을 나왔다.

다음 학생 집에서 대화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학생의 엄마가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라면서 ‘흰 봉투’를 내민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편지 말고, 여기서 그냥 말씀하시라며 또 한 번, 봉투 안 내용물을 털어냈다. 가지런히 접힌, 서툰 글씨의 편지였다. 오, 하느님! 오늘은 왜 ‘봉투’들이 저를 이리 힘들게 하는 겁니까? 촌지나 받는 교사로 오해받기 싫어 지레 설레발을 친 부끄러움은 오래갔다.

어느 초여름, 우리 반 학생 한 명이 돈이 없어졌다고 울면서 교무실로 왔다. 아침에 분명 지갑에 넣어두었는데 체육시간이 끝나고 보니 없어졌단다. 그 당시 오천 원은 제 법 큰 액수였다. 한숨만 나왔다. 종일 고민한 끝에 언젠가 들은, 참으로 원시적인 방법을 택했다. 신문지와 편지 봉투를 한 장씩을 나눠주며 정한 크기대로 신문지를 잘라 10장만 봉투에 넣어 가져오라고 했다.

과연 돈이 든 봉투가 나올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애써 학생들의 시선을 멀리한 채 걷은 봉투 안에 오, 하느님! 신문지와 함께 천 원짜리 다섯 장이 들어있었다. 도박에 용케 성공한 나는 자만심 가득한 해결사가 되었지만 그 자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쯤 뒤, ‘안경을 잃어버려 힘들어’ 하는 여학생의 일기에 나는 분노했다. 눈 나쁜 사람에겐 생명과도 같은 안경을 다시 되돌려줄 것을 엄중하게 ‘명령’했다. 이틀이 지나도 안경은 나오지 않았고, 얼굴 없는 파렴치한을 향한 마지막 경고를 날린 다음 날, 내 의자 위에 쪽지 한 장이 놓여있었다. 더 이상 ‘안경’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애원이었다. 안경은 얼굴에 쓰는 것이 아닌, 여자의 가슴을 가리는 속옷을 자기네들 끼리 부르는 말이었던 것이다. 오, 하느님! 이 섣부른 오지랖을 어떻게 해야 될까요!

어설픔을 넘어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 학생 모두의 생일을 각각 축하해주셨다. ‘햇빛처럼 찬란히, 샘물처럼 드맑게 온 누리 곱고 곱게 퍼지옵소서’ 우리는 한국식 생일 축하노래를 불렀고, 담임선생님께선 고리 달린 영어 단어장을 선물로 주셨다. “좋은 곳으로 시집가서 아들딸 많이 낳고 잘 살아라”는 선생님의 구식 덕담에 소스라치며 손뼉을 치던 그때의 행복한 추억처럼 나도 담임을 맡은 해는 꼭 생일 축하를 해주었다. 문화센터에서 배운 솜씨로 삑사리를 날리며 ‘해피 버스데이 투유’를 플루트로 연주하기도 했다.

학기 초엔 내가 가정방문을 했으므로 여름방학엔 우리 집으로 가정방문을 오게 했다. 학생 수가 적은 학급일 땐 일곱 명 전부가 우리 집을 찾아왔고, 큰 학교 근무 때는 학원 시간이 빈 학생만 왔다. 열 명이 넘는 학생들을 위해 김밥 재료와 샐러드용 채소, 머핀 반죽을 준비를 해놓고, 아파트 현관문에 “선생님 집 가정방문을 환영합니다!” 켄트지를 붙여두었다.

누구와 누구는 김밥을 말고, 또 누구는 샐러드를 비비고, 나머진 머핀을 구웠다. 가족들은 치킨·탕수육·피자를 배달시키면 쉬울 것을 애들까지 고생시킨다고 답답해했지만 학생들은 건네받은 앞치마를 입고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 실습을 했다. 보드 게임을 하며 무너지는 나무 탑에 안타까운 탄성을 지르고, 나의 옛 앨범의 촌스런 복장에 깔깔거리다가 부모님과 약속한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편의점에서 아이스 바를 하나씩 물고 행복한 얼굴로 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그들을 배웅하는 길은 나 역시도 흐뭇했다.

박수칠 때 떠나는

그러나, 나의 교직생활이 늘 이렇듯 흐뭇하고 감성적이며, 사랑스럽고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학부모의 섣부른 오해로 가슴을 후비는 고통을 맛봐야 했고, 무례한 학생의 언행으로 당장 교직을 떠나려고 했다. 나의 실수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학생에 대한 죄책감으로 번민하기도 했다. 사랑한 만큼 분노하고 좌절했으며, 열정을 쏟은 만큼 실망하고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했다.

이젠 수많은 희비애환과 사연들을 뒤로하고, 내가 사랑한 학생들, 또 나를 사랑해준 학생들의 곁을 1년 반을 앞당겨 떠난다. ‘교사는 십 년 뒤의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나를 비롯한 많은 교사들의 가르침이 십년 뒤의 사회에 이바지만 해준다면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축복일 것이다. 기다림의 미학을 떠올리며 교사들은 학생들의 변화를 기다리고 기다려야 한다.

오는 3월 1일부터 나는 더 이상 교사가 아니다. 혹여 나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해도 그것은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나이 든 사람을 존중해서 부르는 3인칭 대명사일 뿐이다. 그래도 어디선가 ‘선생님!’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나는 주저 없이 뒤돌아보리라. 학생들로 인한 괴로움마저도 이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추억임에 감사하며….

멀리서 나를 보고서 ‘쌤!’ 하고 달려오는 동백꽃 같은 아이들, 그들과 함께한 교직생활에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나는 내 이름대로 삼십 팔년 동안 ‘아름다운[美] 벼슬[卿]’을 지냈다. 나에게는 교사야말로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벼슬이다.

아름답고도 소중한 추억의 곳간을 간직하게 해준 나의 마지막 ‘십 년 뒤의 사회’에게, 이젠 그리움의 인사를 보낸다. 굿바이!

김미경 영광염산중학교 교사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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