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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계십니까?] 마오쩌둥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경일 회사원 (대한시멘트) | 승인 2020.01.14 17:12 |
이경일 회사원

우리에게 모택동(毛澤東)으로 잘 알려진 마오쩌둥은 장저스와 중화민국 정부에 대항한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거대한 중국대륙에 중화인민 공화국을 세워 현재까지 정권이 유지되고 있다.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중국 공산당 국가수반 권한대행과 50년에서 59년까지 초대 중국 공산당 국가원수를 거쳐 76년까지 초대 중국 공산당 제1대 중앙 위원회 위원장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중국 현대사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며 혹자들은 그를 현대의 진시황(秦始皇)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중국대륙에 공산주의를 건설한 혁명가이자 전략가로 평가하면서, 대약진운동 실패와 문화대혁명으로 약 4천 5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초래한 인물이라고 비판하는 자들도 있다. 사람마다 평가는 빛과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마오쩌둥이 지도층으로서 책임과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어떻게 실천했는가를 알아보자.

마오쩌둥은 부모가 맺어준 뤄이슈와 1907년 결혼하여 3년의 짧은 결혼생활은 뒤로한 채 이질로 사망한다. 다시 1920년 여덟 살 연하의 같은 고향사람 양카아후이와 결혼하여 아들만 셋을 낳는데 정부군에 의해 1930년 29세의 나이로 암살당한다.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1922년 마오안잉이 태어나는데 공산당의 지하조직의 보호를 받긴 하지만 날마다 늘 불안한 삶을 살았다.

마오안잉은 1936년 15살에 파리로 갔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마오쩌둥의 아들이 아닌 가명으로 공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소련군에 편입되어 동부전선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버지가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후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꽃길만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운명이었을까? 1950년 한국에서 6.25가 발발한 것이다.

한국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하여 북한이 밀리자 중국에서는 신생국가임에도 중화인민 지원군이 결성되었다. 마오안잉은 인민 지원군에 지원하였다. 러시아에서 공부한 경력으로 펑더화이군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자원했던 것이다. 마오안잉이 참전하려고 자원했을 때 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장남인 그의 참전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무척 꺼려했다. 마오쩌둥에게 직접 말려달라고 부탁도 했다. 이때 마오의 대답은 “그는 어째든 내 아들이다”라고만 했지 다른 말은 없었다.

마오의 속에는 내가 아들을 이 전쟁에 보내지 않으면, 우리 인민들 중 누가 사지로 자식을 보내겠는가 하는 말이 담겨있었다. 어쩔 수 없이 펑더화이는 1950년 10월 그와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1950년 11월 24일 두 대의 미군 정찰기가 중국군의 위치를 탐지하였으며 다음날 1950년 11월 25일 정오 무렵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 4개의 네이팜탄이 투하되었다. 그중하나가 마오안잉이 있는 동굴근처에 떨어져 사망하게 된 것이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의 전사소식을 듣고 마오에게 직접 알리지 않았다. 중화인민 공화국 당시 2인자인 저우언라이 에게만 보고 했다. 저우언라이도 이 소식을 듣고 수뇌부사이에서는 공유했으나 마오에게는 당분간 알리지 말도록 당부했었다. 결국은 다음 달 마오안잉이 전사한지 1개월이 지나 1951년 1월에 중국 인민지원군 제3차 전역이 감행된 이후에 마오의 비서 예즈룽이 이 소식을 마오에게 전했다.

마오는 아들의 전사소식을 듣고 담배를 물고서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얼마가 지난 후 입을 열어 “전쟁이 일어나면 희생은 당연하지”라는 말 한마디만 남겼다고 한다. 장남이기 때문에 얼마나 아끼고 사랑스런 아들이었겠는가. 그러나 최고 책임자인 만큼 책임도 크다면서 기꺼이 아들을 사지로 내 보냈던 것이다. 아들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며칠 후 며느리의 개가를 주선해주고 개가가 결정되자 거액의 축의금을 주며 축하해 주었다고 한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설에 불과하지만 이 아들이 살았다면 중국도 북한처럼 세습되어 마오안잉이 2인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마오는 사망소식을 접한 후에도 시신을 수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보통의 군인들과 똑같이 장례를 치르라고 말했다. 그래서 평안북도 회창군 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 능원에 함께 묻혀있다. 이 일을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 사이에 우호의 상징처럼 지금도 남아있다.

이경일 회사원 (대한시멘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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