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0.7.14 화 18:56
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영광향교(靈光鄕校)] 고려·조선의 유교 교육과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곳단순히 학식이 많거나 높은 관직에 오른 권력가가 아닌 성품이 올곧은 사람, 사람다운 사람, 남을 배려하는 사람, 자기 이익만을 바라지 않는 사람으로 교육시킨 영광향교(靈光鄕校)
유창수 기자 | 승인 2020.05.19 14:07 |

사람은 인연(因緣) 따라 만나고 인연 따라 헤어진다. 인(因)만 있어서는 결과가 있을 수 없으며, 연(緣)만 있어서도 그 결실은 없다. 인과 연은 필수 불가결한 원인과 결과가 되어 돌고 도는 윤회를 하는 것이다.

지난 가을 쯤 높이 23m, 나무둘레 7.3m, 수령 680년의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를 촬영하기 위해 영광향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운치 있고 조용한 향교는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 했다.

향교(鄕校)는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지방에 설립한 국가교육기관이다. 국도(國都)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이후에 이루어졌다. 고려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3경(京) 12목(牧)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를 교육 했다. 향학(鄕學)의 시초다.

정치적 목적으로 설립된 향교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건립된 최초의 향학은 서경의 학원(學院)이다. 그 뒤 1003년(목종 6)까지는 최소한 3경 10목에 향학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향학을 곧 향교의 전신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인가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127년 인종이 여러 주(州)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다. 각 군현에 학교가 설립된 여러 사례들이 나타남을 감안할 때 이 시기를 향교의 성립기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향교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검토가 요청된다.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수준에 도달한 고구려가 왕경에 태학(太學)을 두어 유학을 가르쳤다. 이어 백제가 박사를 두고 신라가 대학(大學)을 세웠던 사실은 새로운 정치이념과 권력구조의 모형을 유교 속에서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 뒤 통일신라기를 거쳐 고려에 이르면 지금까지 상징적 기능만으로 이해되던 유교적 이념과 유교적 정치구조의 내용이 새로운 시대의 지표로 인식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고려 초 왕건(王建) 이후 역대 고려왕들은 이 새 정치이념인 유교를 새 사회의 질서의 근간으로 하여 정치권력구조를 조직하려 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추세 가운데에서 왕경이나 왕실의 정치구조뿐만 아니라, 기층사회까지 유교이념을 침투시키려는 정치의지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구현하는 기구로 향교제도의 필요성이 증대된 것이다.

이러한 하향적인 통치방향과 함께 신라 말 고려 초에 등장한 지방호족들의 정치·사회활동에 대한 일정한 명분을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유교였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학원을 세워 유교를 교육하였다. 즉 5소경에 이른바 학원의 설치는 하향적 관제체제 속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호족들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설립, 운영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 학원은 지방사회 내부에서 자기발전의 도구로서 유학교육의 필요가 절실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때 향교는 상향적·하향적 요구의 합치점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향교는 상향적 역사운동에서 나타난 측면보다는 하향적 운동과정에서 형성된 교육기관으로 파악함이 타당하다.

정치권력이 기층사회에 침투하려는 구체적 역사현상은 군현제가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따라서 향교는 군현제의 운영과 함께 이해되는 것이 그 실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군현제의 운영은 후기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수의 군현이 속현(屬縣)의 상태로서 외관(外官)이 부재한 상태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군현제 운영의 부진상은 향교운영에도 동일한 문제점을 노출하는 것이었다.

성종 때 12목에 외관의 파견과 함께 경학박사·의학박사를 파견하였던 것은 지방교육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나 아직 완벽한 지방교육제도가 정착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향교의 적극적인 유학교육의 면모를 우리 역사에서 나타내는 것은 조선에 이르러 군현제의 재정비와 강력한 운영이 실시되던 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향교교육은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거제도는 유학교육의 성과를 수렴하는 제도라고 할 때 지방에서의 유학교육도 과거제도와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의 과거제도에는 향공(鄕貢)이라 하여 지방에서의 천거가 있었다. 이는 개경과 함께 지방에서의 교육의 실상을 시사한다. 특히 인종 이후 강화된 향학운영의 자료는 지방군현에서의 유학교육의 면모가 일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려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본다면 향교교육의 실태는 군현제의 강화와 함께 실시되는 조선시대의 향교제도와 비교할 수 없는 저조한 수준이다.

고려시대에 하향적 교육정책, 즉 교화적 정책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유학교육기관으로서 향교의 실상은 오히려 고려의 사사로운 기구에 의해서 운영되는 교육적 성과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향교는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정책적으로 그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향교의 전반적 설명은 조선왕조에서 전개된 역사상을 중심으로 설명된다.

고려시대 창건, 조선조에 이전

영광향교(靈光鄕校)는 향전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때 지어졌다고 전해온다.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향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강화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향교의 흥폐로 해당 지역 수령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을 정도로 지방 교육에 비중을 두었다. 태조 7년(1398)에 이르러서는 중앙에 성균관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 설치를 적극 장려한다. 고려시대에는 영광향교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위치는 조선시대에 새롭게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왜구의 침입으로 세조 2년(1456) 성산(城山) 아래로 읍터를 옮긴 후 세조 11년(1465) 봄에 관사를 준공하였다는 기록이 신숙주의 객관기(客館記)에 남아있어 향교도 이 무렵 관청 인근이었던 지금의 자리에 같이 지어졌을 것으로 본다.

향교는 평지배치의 일반적인 형식인 전묘후학(前廟候學 : 앞에 제사 공간, 뒤에는 강학 공간)의 형태이다. 건물들은 동서로 긴 직사각형의 평탄한 대지 위에 일반적인 전묘후학의 형식으로 배치되었다. 외삼문 내 앞쪽에 문묘공간인 대성전이 있으며, 대성전 앞쪽에 좌우로 동무·서무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 뒤쪽으로는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명륜당 앞쪽의 오른쪽에 동재가 있다. 원래는 서재도 같이 있었으나 재건되지 않았다.

문묘공간과 강학공간 사이는 막돌담장으로 나뉘어 있고, 두 공간의 왕래는 담장 왼쪽 끝에 있는 전사고의 왼쪽 문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정문 앞에 있는 만화루(萬化樓)는 근년에 소실되고 나서 1987년에 복원한 것이다.

향교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서울 성균관이 1400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1407년 복원하면서 영광향교의 배치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영광읍은 당시 옥당(玉堂) 고을로서 향교에는 유생 70명과 예리(禮吏) 2명을 두었으며, 향교는 도호부(都護府)에 해당되었던 향교라 전한다.

이곳에서는 공자·안자·자사·증자·맹자 등 오성(五聖)과 유교 숭상 인물 22명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봄·가을에 제를 지낸다. 대성전 앞쪽으로 수령이 600년 정도 되는 은행나무가, 명륜당 앞에는 480년 정도 되는 비자나무와 500년 정도 되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영광향교는 1985년2월2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선비가 머물며 공부하는 곳

천 년 전 백제의 땅이었던 영광은 중국과 교류를 했던 국제항 법성포가 있었으니 고려시대부터 영광향교가 만들어져 학교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숙정문을 열고 향교 마당에 들어서면 웅장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지는 고목이 향교를 지키고 있다.

명륜당 앞에는 480년 정도 되는 비자나무와 500년 정도 되는 은행나무가 먼 길을 찾아왔을 손님들을 무심하게 덤덤히 맞아 준다. 향교에는 대부분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행목(杏木)이 유학자를 상징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杏)이라 하면 은행나무와 살구나무를 지칭하는 한자이다.

행단은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중국 산동성 곡부현의 성묘 내 유적에서 연유하여 ‘선비가 머물며 공부하는 곳’이라는 별칭이 되었다. 그래서 선비가 공부하는 곳이었던 향교는 대부분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영광향교의 은행나무는 다른 향교에서는 보기 어려운 멋진 고목이다.

자연을 압도하듯 하늘로 뻗어 올라간 은행나무의 거대함은 위엄이 느껴진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향교에서 조용히 수백 년 질곡의 역사를 지켜 본 이 은행나무만을 보기위해 영광을 와도 후회가 없을 만큼 감동을 선사하는 풍경이다. 영광향교 은행나무는 어느 날 순식간에 물이 들어 빛나다가 3~4일 만에 그 잎이 다 떨어진다. 고즈넉한 향교 안으로 들어갈수록 고색창연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고 이곳에서 공부했을 젊은 선비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 선조들이 추구했던 선비란 단순히 학식이 많거나 높은 관직에 오른 권력가가 아니고 성품이 올곧은 사람, 사람다운 사람, 남을 배려하는 사람, 자기 이익만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었다.

‘선비’라는 말의 어원을 찾아보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면서 만든 용비어천가에 최초로 등장한 순우리말로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선비정신이란 선비의 마음을 의미하는데, 선비들은 하루를 보낸 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매일 세 가지를 반성하는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첫째, 다른 사람을 위하여 어떤 일을 도모할 때 진심을 다했는지 반성한다. 둘째, 친구와 더불어 사귈 때 믿음을 주지 못했는지를 반성한다. 셋째, 스승에게 전수 받은 것을 제대로 익혔는지 반성한다. 이는 자신과 친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반성이었다. 선비는 종이책으로 하는 공부보다 마음공부를 더 중요시했다.

선비란 아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머리 공부뿐 아니라 몸 공부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선비의 하루를 살펴보면 매우 규칙적이고 성실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림을 그리며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자연을 통해 순리를 배우며 놀 때에도 예절을 지키고 올바른 자세와 공정한 법칙을 적용했다. 그들의 활동 중 가장 많은 부분이 독서였으며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늘 자신을 돌아보는 명상과 산책을 즐겼다. 스스로 자신의 시간과 삶을 통제할 수 있었던 선비. 물질이 정신을 갉아먹는 이 시대에 큰 가르침을 준다.

만화루(萬化樓)

향교나 서원 정면에 있는 중층 누각으로 하부를 통해 진입을 한다. 만화루의 뜻은 ‘공자지도 만물화생(공자의 도로 만물이 교화된다)에서 따온 말로, 이곳은 휴식을 취하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됐다.

숙정문(肅正門)

영광향교에서는 강학공간으로 진입하는 문으로 숙정(肅正)은 잘못된 것을 엄하게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동무(東無), 서무(西無)

대성전의 전면에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성현의 위폐를 모시는 전각으로 대체로 공문(孔門)의 72제자와 중국역대 명현 22위, 우리나라 18명현 등 총 112위를 종향(從享)한 곳이다.

대성전(大成殿)

공자묘를 대성전이라 하며, 공자의 위패와 중국의 사성, 우리나라의 십팔현 등을 모시고 제향을 거행하는 장소

전사고(典祀庫)

제사에 쓰이는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서재(西齊)

명륜당의 서쪽에 세워진 건물로 강학이 이뤄지는 장소로 아래 유생들이 숙식과 독서를 했던 장소였다.

동재(東齊)

명륜당의 동쪽에 세워진 건물로 강학이 이뤄지는 장소로 상급 유생들이 숙식과 독서를 했던 장소였다.

명륜당(明倫堂)

강학공간의 중심으로 공자와 유교 사상을 받들어 인재를 기르기 위해 강론하는 공간이며, 경전에 관한 시험이나 과거시험을 행하는 장소로도 사용됐다.

성생문(省牲門)

성생(省牲)은 제사에 쓸 짐승을 검사하던 일을 뜻하며, 성생문은 향교의 협문(작은문)으로, 제향 때 쓸 제물이 드나들던 곳이다.

유창수 기자  news@ygweekly.com

<저작권자 © 영광군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영광군민신문 소개광고안내구독신청기사제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영광미디어 영광군 영광읍 중앙로 19  |  대표전화 : 061-352-0120  |  팩스 : 061-351-9401
등록번호 : 전남, 다00359   |  등록일 : 2015.11.23   |  발행인 : 조민상  |  편집인 : 조일근  |  청소년보호책임자 : 조일근
Copyright © 2020 영광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