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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전쟁] 아편전쟁 <3>
이경일 회사원 (대한시멘트) | 승인 2020.05.19 15:44 |
이경일 회사원

영국 상인들에게 아편1,400여 톤을 양도받아 폐기한 임칙서는 아편을 제외한 모든 무역은 종전과 같이 이루어 질것으로 생각했다. 영국 상인들은 본국에 아편의 폐해를 보고하였으나 “아편무역은 본인들의 상정으로 신경 쓰지 않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알아서 하라는 답변이다. 이렇게 관계가 삭막한 시기에 광동을 떠나 주룽반도에 정박한 영국 상선에서 영국군 해군 수병이 중국인 임유희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편으로 관계가 좋지 않은 시기이므로 영국 측에서는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선에서 조용히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임칙서는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살해한 주범을 중국에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영국에서도 범인은 인도하지 않고 영국 법에는 외국에서 저지른 죄를 대상으로는 처벌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임칙서는 실제 영국 법을 들이대며 그들의 주장을 일축하며 이행하라고 압박했다.

이미 임칙서는 영국의 국제 법을 간단하게 중국어로 번역하여 대략은 알고 있었다. 이런 준비를 통해 영국 법으로도 법률상 외국인을 살해한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임을 알고 있는데도 영국 측에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임칙서는 식량공급을 중단하고 영국 상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한편 초조해진 영국 상선의 선장 엘리엇은 아편과 상관없는 로열 색슨 호를 포격해 광저우 진입을 막으려고 했다. 이를 안 중국 측에서는 영국 상선을 보호하고자 수군 정크선 29척을 내보냈다. 청나라 군함은 상선을 개조한 배로 형편없이 영국 상선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고 돌아왔다. 사실상 전초전이었던 이 해전은 영국에서 중국을 얕잡아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불리함을 알고 급히 미국상인들을 통해 서양대포 300문과 함선을 구입하고 주민들을 동원해 방어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영국도 한편으로는 전쟁은 피하고 무역을 재개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임칙서는 아편만은 빼고 종전처럼 할 수 있다고 했다. 영국 측에서는 이 약속이 불확실하다고 거부하자 베이징 본부에서 영국과의 무역을 종결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1939년 12월 6일 양광총독으로 임명된 임칙서는 정부의 명에 따라 영국과의 무역은 물론 모든 관계를 단절하게 된다. 당시 청이 유럽을 보는 시각은 모든 면에서 한수 아래로 보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청이 영국에 대하는 것을 큰 위협으로 보기도 했다. 영국은 당시에도 의회주의였는데 상인들의 로비는 영국 의회를 흔들 만큼의 영향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영국 정부에서는 전쟁에 대한 여론은 매우 비판적 이었다. 그러나 상인들의 로비는 영국의 의회를 흔들었고 마침내 파견하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게 된다. 1839년 10월 파머스턴 수상을 중심으로 영국 내각은 전쟁을 결의하였고 이듬해 2월에 모든 전쟁계획을 수립하고 군비지출에 필요한 예산안을 의회에 표결을 진행했다. 찬전파와 반전파의 주장은 팽팽하여 투표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840년 4월 10일 영국 하원에서 드디어 청과의 전쟁을 수행하기위한 예산 투표가 이루어졌고 결과는 찬성271 반대262표 겨우 9표차로 통과되어 전쟁에 돌입한다.

반대파 일부에서는 과연 아편을 그리스도를 믿는 영국에서 팔아 이익을 남기는 것이 정당한가를 외치면서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일부 양심 있는 의원들의 하소연이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영국 정부에서도 아편전쟁에 대한 고민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1840년 5월 말 인도양 각지에 있는 영국 해군들은 싱가포르로 모이고 6월 15일에 광저우 앞바다에 집결했다. 전쟁을 지휘하는 영국 해군 소장 조지 엘리엇이 통솔하는 영국 동방원정군은 대포 540문을 탑재한 군함 16척, 증기군함 4척, 운수함 27척, 병력 운수함 1척과 인도 주둔군 4000명으로 구성 되어있었다.

영국 주력군은 광저우에 도착했으나 임칙서의 철통같은 방어에 광저우에서는 공격을 하지 못하고 북상하여 아모이(푸젠성 항구도시 대만과 가까움)를 포격하고 7월 5일 저장성을 점령한다. 8월 5일에는 텐진 앞바다까지 접근해 북경에 도광제를 위협하자, 도광제는 임칙서가 잘못하여 영국의 반발을 유발했다고 임칙서를 크게 질책했다. 현실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무능한 군주였던 것이다.

8월 19일에는 영국군이 마카오 통행 관문까지 점령하고 해상 봉쇄를 해 중국은 군사물자 교역이 사실상 차단되었다. 임칙서는 광동의 관문 1개 세금 중 10%만 사용해도 영국군을 격퇴할 수 있다고 보고했으나 도광제의 신임을 이미 잃은 임칙서의 말은 먹혀들지 못했다. 내부 사정을 감지했던 영국 측에서는 임칙서를 비난하고 아편의 배상과 억울함을 호소했다. 현실파악을 하지 못한 도광제는 영국군의 요구를 들어주면 돌아갈 것으로 오판한 것이다. 참으로 무능했던 도광제는 천하의 임칙서를 북경으로 소환하고 만다. 임칙서의 소환은 패전으로 가는 통로였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4부로 계속>

이경일 회사원 (대한시멘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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