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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산서원]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 강항(姜沆) 선생 배향한 역사 교육장
유창수 기자 | 승인 2020.05.26 16:02 |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 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 세라

1980년대 극작가 신봉승이 노랫말을 쓰고 조용필이 불렀던 MBC드라마 <간양록>의 주제가이다. 가수 조용필 제2집에 수록됐다. 정유재란(1592~1598)의 한이 담긴 우리의 아픈 역사다.

세계적 재앙으로 다가온 코로나19 감염병 확산이 줄어들며 무기한 개학이 연기됐던 학교들도 순차적으로 등교 수업을 시작했다. 갑자기 우리들 곁으로 다가온 고통의 끝이 보이는 듯하다. 그 고통의 시작은 시간의 주인처럼 마음대로 시작되었지만 그 끝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의지 밖에서 시작된다. 영광 내산서원(內山書院) 가는 길. 양 옆에 펼쳐지는 들녘은 고통의 끝을 알리듯 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희망과 안정감을 전한다. 계당(溪堂)을 지어 은거하며 귀거래사의 시를 읊고 책을 쓰던 강항 선생. 선생을 배향한 내산서원은 선생의 고매한 문향(文香)과 함께 짙푸른 초록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서원(書院)은 강학(講學)과 선현(先賢)의 제향(祭享)을 위하여, 조선 중기 이후 사림(士林)에 의하여 향촌에 설립된 사설교육 기관인 동시 향촌자치 운영기구였다. 이 서원은 수은 강항(1567~1618)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13년(1635)에 건립하였고, 숙종 28년(1702)에 고쳐지었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으나, 광복 후 현 소재지에 복원하고 내산서원이라 이름 하였다.

그 뒤 1993년부터 10여년에 걸쳐 경내 정화 사업이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용계사의 편액은 송시열의 휘호로 전해져 내려 왔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내산서원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고, 용계사에는 강항 선생 및 동토 윤순거의 신위와 수은 선생의 초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측 산기슭에는 강항 선생의 묘소가 있다.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 강항(姜沆)

강항 선생은 1567년(명종22년)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수은(睡隱)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진주 강씨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을 시조로 한다. 강이식 장군은 고구려에서 나고 자란 정통 고구려인으로 그의 친부는 요동성주 강철상이다. 진주라는 본관은 강진(650~)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태중대부판내의령(太中大夫判內議令)을 역임, 정순의 시호를 받고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진주(진양·진산으로 불리기도 함)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주강씨는 크게 은렬공파, 인헌공파, 박사공파, 소감공파, 관서공파 등 다섯 파로 구성되는데, 박사공파가 가장 크다. 박사공파는 고려 때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을 이끌고 일본정벌에 나섰던 강계용을 중 시조로 한다.

조선시대의 국교는 유교였으며 그 학문은 성리학이다. 조선조의 성리학 연구는 중국을 앞설 만큼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조선조 유교 인물로서 성리학 연구에 업적을 남긴 인물은 많다. 그러나 왜란을 만나서 일본에 포로가 되어 그들에게 주자학을 전파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인물은 영광 출신 강항 선생이 유일하다.

강항(1567~1618)은 22세에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26세에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30세에 공조좌랑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 1597년 휴가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강항은 분호조참판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져 남원이 함락 당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명을 모았으나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해로로 탈출하려다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었다.

적국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 고초를 겪으면서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을 생각했으나 일본에 당한 수모를 후일에 갚는다는 생각으로 살기를 결심한다. 강항은 피눈물을 삼키며 직접 보고 들은 10여만 명 조선 포로들의 참상과 일본의 풍속, 지리, 왜군정보 등을 선조에게 전하고 이를 수록한 건거록(巾車錄)을 남겼다.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일본에 체류하면서 기밀에 속하는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쓴 것이기에 군사적·지리적 가치가 매우 높다. 강항이 포로로 일본에 있는 동안 학문과 문필이 높아서 그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고, 일본의 승려 중에서도 학문이 뛰어난 인물과 교유하게 되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묘수원(妙壽院)의 승(僧) 순수좌(舜首座)와 만나서 그에게 주자학을 가르쳤다. 그는 곧 승려의 직을 버리고 유학자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등원성와(藤原醒窩)였다. 이 사람은 일본 유학의 정통으로서 산기암재의 조종이 되었다. 일본의 유학은 강항을 통하여 등원성와로 계승되었다.

강항은 일본인 제자들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탈출하여 약 47일간 항해를 해서 1600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생각하여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618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소로는 <운제록>, <강감회요>, <좌씨정화>, <간양록>, <문선한주>, <수은집>을 남겼다.

1635년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 사우가 건립되고 우암 송시열이 축문을 지었다. 그러나 1년 뒤 화재로 소실되어 순용리 용산마을에 용계사를 건립하고 제향해 오다가 이건한 쌍운리 내산서원(內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일본의 효고현에 있는 류노 성주 아카마쓰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맹자리·강목촌의 전설이 되다

강항 선생이 일곱 살 되던 해 서당에 가는 길에 느티나무 아래서 책장수를 만났다. 강항 선생이 책 구경을 청하니 책장수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거절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여줄 것을 청하자 7권으로 된 ‘맹자’ 한 질을 내주자 처음부터 책장을 넘겼다. 강항 선생은 글을 읽는 것도 매우 빨라서 다른 사람들이 한두 줄도 아직 읽지 않았는데 벌써 책장을 넘기니 ‘열 줄을 한꺼번에 읽는 사람(十行俱下者)’이라 했다.

책장수는 한권의 책이라도 팔수 있을까 은근히 기대했으나 한 질을 다 읽은 강항 선생은 책장수에게 책을 그냥 돌려주었다. 책장수는 강항 선생에게 책사기를 권했으나 책을 다 읽어서 사지 않겠다고 했다. 책장수는 반신반의하며 ‘맹자’ 한 질의 내용을 물으니, 척척 대답을 하였다. 그제야 책장수는 보통 아이가 아닌 신동(神童)임을 알고 책장사가 수재(秀才)를 만나면 돈을 받지 않고 주는 예가 있어 강항 선생에게 주고자 했다.

다 외워버린 책이니 다른 사람에게 팔라며 가버렸다. 책장사는 돌아가는 길에 느티나무 위에 책을 매달아 놓고 갔다. 이런 일이 있는 후 후인들이 그 옆 정자를 맹자정(孟子亭)이라고 불렀고, 느티나무는 맹자수라 불렀다. 지금은 정자와 나무는 없고 그 자리에 맹자비를 세웠다. 또 강항 선생이 8세 때 주변 마을에 신동으로 알려진 이후 고창군 칠암마을을 들렸는데 마을 유림들이 강항 선생을 시험하고자 송나라 주자가 쓴 통람강목을 건네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책을 들자마자 막힘없이 줄줄 읽어가면서 밤을 하얗게 새워 강목을 읽고 또 읽어서 다음날 동네 어른들 앞에서 줄줄 외우니 칠암 마을 사람들이 ‘강목촌’이라 부르자고 했다고 한다.

피눈물로 쓴 ‘간양록(看羊錄)’

일본이 두려워했던 책, 일본의 역학구도, 풍속, 가치관, 일본에 대한 방비책 등을 상세히 소개, 일본 입장에서 간양록은 매우 위험한 책

간양록(看羊錄)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형조좌랑 강항이 2년 7개월간 체험했던 일본 생활을 기록한 책이다. 원래는 건거록(巾車錄)이라 했다. 죄인이 타는 수레라는 뜻인데 강항 선생이 포로였던 자신을 스스로 죄인으로 생각하고 지은 것이다.

강항 선생의 수제자인 윤순거 선생이 간양(看羊)이라 고쳐 불렀다. ‘간양’이란 중국 한나라 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 억류되어 흉노왕의 회유를 거부하고 양을 치는 노역을 하다 19년만에 돌아온 소무의 충절을 뜻하는 말이다.

간양록은 한민족 역사상 포로 실기문학이라 불릴 정도로 완성도도 높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일본의 실상에 대한 분석과 이를 기반으로 한 대책까지 완벽하게 정리한 일종의 일본 분석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책의 내용 구성은 적지에서 임금께 올린 ‘적중봉소’, 당시 일본 각지의 특징을 밝힌 ‘적중견문록’, 귀국 뒤에 올린 ‘예승정원계사’, 적국에서의 환란생활의 시말을 기록한 ‘섭란사적’, 포로들에게 준 ‘고부인격’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들은 적국에서 당한 포로들의 참상과 그곳에서 보고 들은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란에 대비해야 할 국내정책에까지 언급하고 있다. 당시 일본의 정보에 취약했던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문헌이다. 간양록의 ‘적중봉소’와 ‘섭란사적’은 강항의 친필로 보이며 그 밖의 것은 다른 사람의 서체로 보인다. 강항의 친필 여부를 떠나 당시 일본의 지리와 풍속 등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문헌이다.

막연히 일본에 대해 분노와 두려움과 갖고 있던 조선은 그를 통해 일본의 실상을 상세히 확인하고 일본의 진짜 속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강항은 포로 생활 중에도 왜국의 기밀을 파악하여 적중봉소(賊中封疏)하였다. 이 중에서 명나라 사신 왕건공에게 보낸 것이 조정에 도달했다고 1599년 4월15일자 선조실록에 나온다. 이후 간양록은 조선 선비들이 일본을 이해하는 필수 교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간양록은 일본인에 의해 분서의 화를 입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 장수와 다이묘(지방을 다스리는 영주) 등에 대한 인물평은 물론 일본의 역학구도, 풍속, 가치관, 일본에 대한 방비책 등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일본 입장에서 간양록은 매우 위험한 책이었던 것이다.

서원이 산수 자연에 있는 것은 심성을 맑게 하여 인간의 착한 본성을 찾는 것에 있다. 인간의 도리와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 가다가 멈추는 곳, 풍경너머 삶의 길을 조심스레 건네는 문자로 된 이야기가 있고, 견딜 수 없는 시간의 흔적과 그림자들을 위로하는 시간이 머무는 곳 내산서원. 삶에 찌들어 복잡한 마음에 힐링이 필요하다면 평온한 이곳 내산서원에 들려 짤막한 명상을 통해 마음가짐을 제 정비하고 돌아오길 추천한다.

지친 당신의 마음에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고 있다.”

위치 :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강항로 101

유창수 기자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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