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수많은 영화를 만납니다. 그 영화들은 세월이 흘러 잊히기도, 소환하면 기억나기도 하지요. 어떤 영화는 제목만 들어도 감동으로 다시 다가오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 즈음 광주 동방극장에서 만난 찰톤 헤스턴 주연의 ‘벤허’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교시절 만난 ‘25시’의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연인 안소니 퀸이 자신을 찍는 사진사를 바라보는 백치 같은 표정은 방금 본 것처럼 생생합니다.

‘로마의 휴일’에서 만난 오드리 헵번은 영원히 아름다운 처녀의 표상처럼 깊이 남아있고, 고교 시절 광주 시민관 극장에서 만난 캔디스 버겐의 청순한 모습은 잊히지 않습니다. 70년대 말 즈음 만난 알렉스 헤일리 원작 영화 ‘뿌리’는 장남인 저에게 큰 울림을 안겼습니다. 지금도 매년 추석이면 저를 부르지요. 미국의 흑인 소설가 알렉스 헤일리는 흑인인 자신의 과거, 즉 뿌리를 알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서부 아프리카 감비아의 한 마을에 대한 사실을 끈질기게 추적하게 됩니다.

노예로 처음 잡혀온 쿤타킨테 이래 6대에 걸친 모계(母系)측 내력을 ‘뿌리’라는 소설로 완성, 영화로 제작돼 인기를 모았지요. 자신의 뿌리를 찾아 헤매는 모습, 간신히 모계의 뿌리를 찾는 모습은 교훈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영화를 통해 선조들의 무덤이 가까이 있는 제가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가를 알았습니다. 추석 뿐 아니라 즐겁고 슬픈 일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산소를 찾게 됐습니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는 무성하게 자라지도, 오래 살지도 못합니다. 뿌리가 깊고 튼튼해야 왕성하게 자라고 오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자식이 귀하다고 뿌리 없는, 혹은 뿌리를 모르는 자식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자식들 고생스럽다고 나이든 부모가 자식들 찾아가는 것은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뿌리가 없다고, 약하다고 푸대접 받으며 살아가는 자식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튼튼한 뿌리를 내리는 자식으로 만드는 것은 부모의 몫입니다.

추석이 코앞입니다. 정부가 귀성을 자제해달라고 합니다. 코로나19가 추석 귀성길 마저 삼키고 있습니다. 올해는 살던 곳에서 조용히 추모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귀성 자제해달라니 동해안 등 관광휴양지 예약이 밀린다니 뒷맛이 씁쓸하기도 합니다. 학교도, 교회도, 회사도 비대면 입니다. 성묘도 비대면으로 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참 쑥스럽습니다. 조상님 뵙는데 비대면이라니요. 천당도 비대면이라는 우스개가 나오겠습니다.

가고 싶은 곳도 가지 말라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만나지 말라고 합니다. 보고 싶은 것도 보지 말고, 운동도 혼자나 하라고 합니다. 학교 오지 않는다고 야단치던 선생님은 거꾸로 학교에 오면 안 된다고 합니다. 오라고, 만나자고 난리치는 것은 이상한 종교인들 뿐 입니다. 개천절에 집회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이러스 같은 사람들이 하는 바이러스 같은 집회는 막아야 합니다. 법보다 강한 소독약은 없을까요?

조일근 편집위원장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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