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재 아시아문화학회 부회장(언론인)

대통령의 존재감이 시궁창에 쳐 박혔다.

단지 피의자의 신분이 됐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야당이 탄핵 추진을 결정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저런 분을 우리가 국가 지도자로 받들고 살았는가 싶은 국민들의 깊은 자괴감 때문이다. 하고도 상식을 넘어서다 못해 치졸하기 짝이 없는 청와대 발 비리와 불법들이 숨 가쁘게 속속 발가벗겨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 진면목이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지경이어서 그동안 정권의 편에 서있던 보수 언론에서 조차 ‘박근혜 아줌마’라는 제목을 단 칼럼이 게재될 정도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박·최 일당의 사냥터에 다를 바 없었다.

이 지경이 됐어도 대통령은 그저 제 살기에 급급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어서 국민의 분노가 쌓여가고 있다. 국민 앞에 나서서 처신에 문제가 있었다고 고백하며 검찰 수사 받겠다고 한지가 바로 얼마 전인데 낮 빛 하나 바꾸지 않고 약속을 어겼다. 이럴 때는 못돼먹었다는 말 보다는 막돼먹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아무리 못된 사람도 허물을 들키거나 제 입으로 뱉은 말을 번복할 때는 부끄러움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호위무사에 다를 바 없는 변호사의 입을 통해 ‘검찰 발표는 사상누각이다’ 라고 무지르며 수사를 거부했다. 대통령은 혐의가 없다는 검찰 발표를 기대하고 수사를 흔쾌히 수락하는 모습을 연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표변함에 다시 200만 촛불이 모였고 국민 78%가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고 있다. 대통령 지지율은 또다시 4%로 곤두박질쳤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의 추락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세월 호 7시간의 비밀이 그 정점이 될 것이다. 주권자인 국민이 그 권리를 정권에 위탁하며 요구되는 핵심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녕을 지키라는 주문이다. 만에 하나 지금 제기되고 있는 대통령 7시간의 의혹이 어린 학생들의 목숨을 팽개친 사실로 드러나기라도 했을 때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형극이 어디에 이를 것인지 차마 두려울 지경이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을 찾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우리는 필시 선거의 의미에 맞닥뜨리게 된다. 과연 지난 대선에서 우리 국민들은 당시 박근혜 후보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정보를 공유하고 투표에 임했는지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다. 부모를 흉탄에 보내고 홀몸으로 살아 온 그녀에 대한 연민, 박정희 신화에 대한 맹신, 진보가 종북인 극우주의자들과 보수언론이 만들어놓은 도그마, 조작된 세대갈등 등등 왜곡된 편견에 기대어 투표장에 나갔던 그 발길이 바로 지금과 같은 참담한 결과에 이르지 않았는지 심각하게 되돌아 볼 일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렇게 충격적인 언급을 했다. “사람 보다는, 수많은 알고리즘을 분석해 최상의 결과를 선택하는 기계에 투표를 맡기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상식 밖의 추잡한 사건들이 잇달아 발가벗겨지고 있는 요즘의 게이트 정국을 보면, 지젝의 언급이 정말 통렬하게 다가선다.

박호재 아시아문화학회 부회장(언론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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