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일 회사원

세종은 미신을 신봉하며 특히 불로장생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이런 현실을 그냥 보고 넘어갈 엄숭(嚴崇)이 아니다. 신선이나 선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종의 환심과 은총을 구걸하기에 이른다. 세종이 미신을 숭배하는데 좋은 말과 더욱 믿도록 부채질하는 엄숭과는 환상의 콤비가 되어 희희낙락거리며 아부와 아첨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기 시작한다. 어리석은 군주와 그에 걸 맞는 간신과의 관계는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사이가 되어버렸다.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예부상서까지 오른 엄숭은 권력욕이 갈수록 더해간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재상(宰相)자리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자기가 출세하기위해 발판으로 삼았던 하언(夏言)이 재상으로서 들어앉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물론 엄숭과도 각별한 사이였다.

몇 년 전만해도 한직으로 전전하던 엄숭을 세종께 추천하여 궁궐로 들어오게 한 사람이 하언 아닌가. 그러니 하언은 엄숭보다 나이는 작아도 부모 다음가는 천하에 은인 이었다. 그렇지만 엄숭은 은인 같은 것은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만 출세하면 그만이다. 은혜 의리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엄숭이다. ‘독하지 못하면 장부가 아니다.’가 엄숭의 소신이다.

자기가 이만큼 올라갔으니 이제부터는 하언이 기댈 언덕이 아니라 정적(政敵)이 되어버린 것이다. 엄숭 에게는 하언이 넘어야할 산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언 역시 업무처리가 정확하고 정치인으로 별 문제가 없으므로 무난하게 이끌어나갔고, 세종도 하언을 신임하고 있었다. 엄숭이 하언의 자리를 탐낸다고 해도 하언 역시 녹록한 위인은 아니었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하언은 쉽게 제거하기가 힘든 상대였다. 그런데도 엄숭은 하언을 올라서기 위해 연구 분석하고 그의 인간성 속에서 약점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하나하나 관찰하면 약점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언의 약점이라면 자부심이 강하고 교만하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이것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주관적인 평가일 수밖에 없다. 재상자리에 있으면서 교만을 부리지 않고 겸손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엄숭은 교만하다는 틈을 이용하여 유연함으로 강함을 이기는 방법을 구사해 세종과의 사이를 벌리고 그 사이로 자신이 침투하고자하는 방법을 만들어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간신이 되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었다.

하언은 성격이 급하고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해대는 스타일이다. 이런 급한 성격으로 인해 가끔 세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때가 있다. 대신들이 보는 면전에서도 체면을 보지 않고 직언을 하며 깔아뭉개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도 주의 깊게 살피며 엄숭은 마음속으로 차곡차곡 쌓아가며 황제 앞에서는 하언과 정반대로 표정을 살피며 부드럽게 처신했다. 늘 온순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세종의 좋아할 말만 골라서 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세종의 마음은 조금씩 엄숭 쪽으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하언은 성격이 아랫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엄격하게 처벌하므로 관리들이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성격 때문에 원망하는 관리들이 많았다.

그러나 엄숭은 이들도 너그럽게 대하면서 곤란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도와주기 까지 한 마음이 넓고 후덕한 관리라고 칭찬까지 받을 정도였다. 또한 황제를 옆에서 모시는 환관들까지 매수하여 하언을 비방하며 세종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자기에게는 은인이었던 하언을 이렇게 비방하고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환관들을 매수하여 하언을 짓밟는 것은 엄숭 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능제강(柔能制剛: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김)’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엄숭의 나긋나긋한 전략이 먹혀들어간다. 세종은 드디어 하언의 강직함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으며 때로는 화를 내기도 했다. 하언 에게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엄숭 에게는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엄숭은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하언을 향해 결정적인 한방을 날린다.

하루는 세종이 엄숭을 불러 요즘 왜 하언과 관계가 그렇게 좋지 못하냐고 묻는 일이 있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엄숭은 갑자기 온몸을 부르르 떨며 땅바닥에 엎드리면서 서럽게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세종은 돌발적인 상황에 놀라면서 60이 넘은 백발노인이 무슨 억울한 일이 있기에 저렇게 통곡을 할까 하면서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종은 엄숭을 달래며 은근한 목소리로, 울지만 말고 사실을 말하라고 했다. 순간 엄숭은 쾌재를 부르며 이제는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수집한 하언의 죄상을 거짓말은 많이 보태 낱낱이 고해바친다. 한 가지 한 가지 말할 때마다 흐느끼며 슬픔을 토로하고 고자질을 해 대자 듣고 있던 세종도 화를 내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엄숭은 다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제 하언은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4부로 이어집니다.〉

이경일 회사원(대한시멘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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