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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스러운 영광] 영광군의 성씨 <11>"천년의 빛 영광"은 영광의 역사가 마치 1000년에 불과한 것으로 알기싶다. 하지만 영광 사람의 역사는 마한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광을 시작으로 하는 성씨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유창수 기자 | 승인 2021.07.15 15:30 |
기계 유씨 시조 유삼재 묘역 입구의 ‘백세일실’(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미현리 281) 백세일실이라는 말과 같이 기계유씨는 한 뿌리이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한 가족이다. 기계유씨 후손들이 살아가는 면면을 살펴보면 현재에도 현달한 후손들이 고위직에 올라 가문을 빛내고 있으며 중용을 지키며 소리 소문 없이 강한 문증으로 유명하다.

기계유씨(杞溪兪氏)

시조는 신라때 아찬을 역임한 유삼재(兪三宰)이다. 그의 후손인 유의신(兪義臣)이 신라가 멸망한 뒤 고려에 복종하지 않자 태조가 그를 기계현(杞溪縣: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의 호장(戶長)으로 삼았으며, 그의 후손들이 기계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었다. 고려 전기에는 여러 대에 걸쳐 은둔하였으며, 후기에 경기도로 이주한 유득선(兪得瑄)·유선(兪僐)·유승계(兪承桂) 3대가 출사하여 현달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98명의 문과 급제자와 3명의 상신을 배출하여 열력(閱歷)이 단연 뛰어났다.

대표적 인물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유응부(兪應孚)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 평안도절제사를 거쳐 중추원동지사로 있을 때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같은 시기에 유효통(兪孝通)은 세종 때 대사성을 거쳐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전의감정(典醫監正) 노중례(盧重禮)와 함께 약용식물(藥用植物)을 정리한 《향악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과 향약방문으로 된 의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하였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에 위치하고 있는 기계 유씨 시조 유삼재 묘역 전경

유효통의 재종제인 유해(兪解)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으나, 그의 자손들이 기계유씨를 명문으로 발전시켰다. 유해의 손자 유여림(兪汝霖)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예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지냈으며, 후손들이 조선 중기에 명성을 떨쳤다. 아우 유여주(兪汝舟)는 학자이며 명필이었다. 여림의 아들 유강(兪絳)은 명종·선조 때 문신으로 호조판서에 이르렀으며,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인재를 모아 가르쳐 문풍을 일으킴으로써 이때부터 함경·평안 양도 선비들도 과거에 많이 오르게 되었다.

유길준(1856-1914) 유길준은 정치가, 개화운동가이다. 1881년(고종18)일본에 건너가 게이오의숙에 입학했다가 82년 귀국, 83년 외무랑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한 뒤 주미 전권대사 민영익을 수행하여 도미, 보스턴대학을 다녔다. 85년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온 뒤 개화당으로 몰려 구금되었다. 구금기간에 《서유견문》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95년에 탈고했다. 94년 갑오개혁 때 외무참의 등을 지내고, 95년 김홍집 내각의 내무협판을 역임, 96년 내부대신에 올랐으나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해산되자 일본에 망명했다가 1907년 순종 황제의 특사로 귀국했다. 그 후 흥사단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국민경제회를 설립했으며 계산학교를 설립했다. 1910년 대한제국의 훈1등 태극대수장을 받았다.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에서 남작을 주었으나 거절했다.

유여림의 손자 유홍(兪泓)은 선조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시문가(詩文家)·장서가(藏書家)로 알려졌다. 그의 아들 유대수(兪大脩)·유대진(兪大進)·유대일(兪大逸)·유대정(兪大禎)·유대경(兪大儆)·유대건(兪大建) 등이 모두 선조와 광해군 때 벼슬을 하였다. 유대일의 아들 유백증(兪伯曾)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우고 이조참판·대사간을 지냈으며, 정묘·병자호란 때 끝까지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충경공 유백증 영정 유백정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우고 이조참판·대사간을 지냈다. 기계유씨는 자타가 인정하는 명성이 높은 사대부 집 가문이다. 조선시대 때 3명의 정승과 수많은 고위직 인물을 배출하였다. 현재 인구수 대비 과거급제자를 따지면 대한민국 성씨들 중에서 10위 이내에 들것이다.

유대정의 아들 유수증(兪守曾)은 소북파(小北派)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사위로, 유영경이 광해군 즉위 초 대북파(大北派)에 의해 숙청되자 12년 동안 은거하였다가 인조반정 뒤 장령을 지냈다. 유강의 증손 유성증(兪省曾)은 병자호란 때 강화에 들어가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활약하고, 뒤에 강원도관찰사·예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기계유씨대종회

유성증의 두 아들 유황(兪榥)·유철(兪櫛)과 그의 재종질인 유계(兪棨)은 모두 1633년(인조 1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유황은 인조 때 관찰사를 지냈으며, 척화론자로 두 차례나 유배되었고, 유철은 경기도관찰사·대사간을 거쳐 현종 때 대사헌에 이르렀다. 유계는 현종 때 예문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조참판을 지냈으며, 고대 예설(禮說)의 근원과 흐름을 밝힌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지었다.

포천에 위치한 사육신 유응부(兪應孚) 비 본관은 기계(杞溪, 혹은 川寧).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 포천 출신. 키가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해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이 소중히 여겼다.

유철의 손자 유척기(兪拓基)는 영조 때 노론(老論)의 원로로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대 명필로서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였다. 그의 사촌형 유최기(兪最基)도 대사성·대사헌·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유척기의 조카 유언집(兪彦鏶)과 유언호(兪彦鎬) 형제도 영조·정조 때 현달하였는데, 특히 유언호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문화정치를 펴는 데 공을 세워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밖에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대사성·강화부유수를 지내고 시문에 뛰어났던 유언민(兪彦民), 알성문과·문신정시·문과중시에 각각 급제한 수재로서 대사헌·중추부지사를 지내고 역시 시문에 뛰어났던 유언술(兪彦述)도 같은 항렬이다.

사육신 유응부 장군 묘

숙종에서 정조 대에 걸쳐 성세를 보였으며, 그뒤에도 학자·문인을 많이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은 영·정조 때 서예가로 전서·예서의 대가 유한지(兪漢芝), 순조 때 대문장가 유한준(兪漢門), 성리학의 대가 유신환(兪莘煥), 한말 서예가로 특히 초서에 뛰어난 유창환(兪昌煥) 등이다. 또 유호인(兪好仁)은 성종 때 시·문·글씨에 뛰어나 3절(三絶)이라 불렸다.

불사이군(不事二君) 과연 임금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 유응부 장군을 기리는 충목단(경기도 포천시 소홀읍 무봉리)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겁박해 왕위를 찬탈하자, 세조를 죽이고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을 복위하기 위한 의거를 준비하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 중의 한 분인 벽량(碧梁) 유응부 장군을 기리는 충목단

구한말에는 개화의 선구자 유길준(兪吉濬)은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음력 폐지와 양력 사용, 종두법(種痘法) 시행, 우편제도 실시, 단발령(斷髮令) 시행 등 많은 개혁정책을 수행하였다. 또 일제강점기에 유민식(兪民植)은 이명(異名)이 정근(政根)으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옥고를 치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고, 《조선일보》사장을 지낸 유진태(兪鎭泰)는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노비를 두지 않는 양반 유성기(兪聖基)의 인정

1700년대 후반 충청북도 진천군의 한 마을에는 유성기(兪聖基)라는 인심 좋고 평판 좋은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유성기는 다른 악독한 양반들과는 다르게 원래 서자 출신으로 어렸던 시절에는 부친에게 버림받아서 모친과 굉장히 힘들게 살았다가 상업에 뛰어들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수성가에 성공한 인물이었는데, 밑바닥 생활을 한적이 있어서 신분상 차이가 있는 사람들한테도 인자하게 대하는 편이라 마을에서도 평판이 좋았고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유성기가 아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있는데 등에 아이를 업은 여자 거지가 열린 문으로 들어오더니 슬금슬금 밥을 먹는 곳까지 들어왔다. 여자 거지는 말 없이 대뜸 국을 가져다가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절반을 마시더니 한 마디 말도 없이 또 더러운 맨손으로 이런저런 반찬을 엉망으로 주워서 질겅질겅 씹어먹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그의 겸인(집사)가 깜짝 놀라서 여자 거지를 끌어내려고 하자 유성기는 눈짓으로 만류했는데 그 이유는 유성기 본인이 부유한 사람으로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먹던 밥 절반을 덜어서 그 여자 거지에게 주며 “국과 반찬을 먹었으니 밥도 먹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한참을 그를 보더니 밥을 받아서 먹고 있는데 유성기는 옆에 있던 겸인(집사)에게 다시 밥상을 차려오라고 했고 그 밥상 역시 여자 거지 혼자 다 먹어치웠다고 한다. 그러자 유성기는 그 여자에게 돈을 한 무더기 챙겨주더니 “아이와 갈데가 없으면 다시 찾아오게”라고 얘기했고 그 여자는 돈과 함께 밥상에 있는 비싼 밥그릇을 들고는 말없이 집을 나갔다.

여자 거지가 집을 나가자 유성기의 상단에서 일하던 건장한 체격의 남자 하나가 그 여자를 가만히 따라가 보았는데 마을 숲 속으로 여자는 사라졌고 숲에 들어가 보니 여자 거지와 한패로 보이는 일당들이 가득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이들은 칼이나 도끼 등의 흉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시기 도망친 노비 및 산적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마을의 부자나 양반 등을 습격해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던일들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여자 거지에게 물었는데, “왜 이렇게 빨리 왔는냐?” 묻자 여자 거지가 상황을 설명하면서 대답하길 “소문대로 인심이 너그러운 사람이라서 차마 그 분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산적 두묵이 말하기를 “그 말을 들으니 나라도 그 사람은 괴롭히고 싶지 않다. 그런데 돈과 그릇은 왜 가져왔느냐?” 여자 거지가 대답하기를 “만약 제가 돈과 그릇이라도 가지고 오지 않고 빈손으로 왔다면 저 혼자 다 해먹고나서 두목을 속인다고 의심하지 않으셨거ᅟᅦᆻ습니까?” 그리고 나서, 여자 거지는 업고 있던 아이포대기를 풀었는데 그 안에는 죽은 아기 시체 하나와 날카로운 칼이 있었다.

산적 두목은 이 말을 듣고, “그래. 우리들 중 머리쓰는 건 너가 제일이니 이 곳은 그냥 넘어 가고 다른 곳을 알아보자.”고 산적 두목은 말했다.

이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던 남자는 유성기의 집으로 돌아가 자기가 목격한 내용을 유성기에게 말하자 유성기는 한동안 별 말없이 있다가 옆에 있던 겸인(집사)에게 말하기를 “이제부터 마을에 하루 세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정해진 시간에 밥을 따로 준비해서 나눠주도록 하게. 그리고 마을에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루 쉬어갈 집도 한 채 알아보게.”

이 말만을 하고는 숲에 있던 산적무리들은 관아에 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후에도 근처 다른 마을에서 재물이 털리거나 양반이 죽는 일들이 일어났는데 유성기가 있던 마을만큼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유성기의 집에는 노비가 전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전부 면천을 시켜주기도 하였고 다시 노비로 전락하게 하지 않기 위해 글을 기본적으로 가르쳤고 특별한 재주를 원하는 자에게는 장인에게 기술을 배우게 하였고, 상단에서 일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그곳에 자리를 주었으며 무과 급제를 희망하는 사람은 지원을 해주어 급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나주임씨

시조 임비는 고려 충렬왕 때 대장군이었다. 시조의 9세손 임탁이 해남 감무를 지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회진으로 낙향하여 살았다. 본래는 회진임씨였으나 회진이 나주에 속하면서 나주임씨로 명명되었다.

영호재

조선조 나주임씨의 후손 중에 상신에 오른 임한호가 있는데, 그는 정조 때 수찬, 북평사,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순조 3년에는 대사간이 되었으며 그 뒤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순조 21년(1821)에 우의정에 올랐다.

좌승지 협의 14세손인 봉수가 고창군 대산면에서 홍농읍 계마리로 입향하였다.

인동장씨

시조 장금용은 고려 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장선은 고려 문종 26년(1072) 금오위 상장군에 올라 후손들이 옥산에 정착하여 관향을 옥산장씨로 하다가 조선조에 옥산이 인동으로 개칭됨에 따라 인동장씨로 명명하였다.

영광군의 인동장씨는 상장군 장금용께에서 충정공 장안세, 태상랑 장백, 직제학 장계, 문숙공 장순손, 등으로 나뉘어 있다.

안동장싸는 6세 백림은 고려조를 대표하는 충신으로, 정2품 벼슬인 우참찬을 역임했다. 백림은 40여 년간 임금에게 충언하며 생활하다가 모함으로 진도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유배에서 풀려난 백림은 함평에서 후학들을 교육시키면서 정착하였다.

영광 입향조는 이후 덕호리·신월리 향월마을에 집성을 이루었고, 참찬공 15대손 덕수·덕춘 형제는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함평군 함평읍 진양리 양림마을에서 영광군 묘량면 삼효리 효동마을로 입향하여 이후 덕수의 자손들은 영광읍 양평리로, 덕춘의 자손들은 백수읍 상사리로 이거하였다. 그리고 팔익·구지 형제는 함평읍 양림에서 형 팔익은 홍농읍 월암리 풍암으로, 동생 구지는 대전리 한밭으로 입향하였다. 당시 덕수의 신분은 주부, 덕춘은 군기시였다.

참찬공 백림의 31세손인 학근(1870-1920)은 대전리에서 출생하여 통정대부호조참의에 이르고, 그의 아들 만포 경섭(1893-1952)은 대전리 한밭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많은 한시를 남겼다. 그가 쓴 충주지씨 지계청장군에 대한 추모시는 다음과 같다.

논공행상을 묘당에서 하였으니/단서의 철권을 누가 감히 잊으리오/비린내와 먼지를 쓸어 없애 춘풍이 일어났으니/해와 달처럼 동방에 만세토록 명성이 전하리라/

담양전씨

시조 전득시는 고려 의종 때 참지정사를 지냈으며 담양군에 봉해졌다. 견룡이 임진왜란 때 장성 삼계에서 군서면 만금리로 입향하였다.

영광전씨

고려전기에 영광김씨와 더불어 영광지역의 대표적인 토성세력으로, 전씨의 본관은 문헌에 담양·남양·연안·태산·교동·안주·진원·하음·정산·우봉·예산 등을 비롯하여 140여 본이 있으나 이 중 연원이 가장 오래된 것은 영광정씨이다. 시조 전동회는 운기강군으로 고려창업을 도와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

그 후 후손에 대한 기록이 실전되어 소목을 상고할 수 없으나 고려 성종 때 진사에 급제하여 형부시랑·중추원부사·이부시랑을 지낸 전공지(~1014)가 있다. 그는 외교관련 문서작성에 능했으며, 태학박사로 1007년 탐라의 지형도를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후에 좌산기상시에 추증되었다.

나주정씨

나주정씨는 고려중엽에 군기감에 추증된 정해를 시조로 한다. 시조의 증손이녀 중조인 설재 정가신(1224-1298)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올라 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도를 지낸 관력으로 군기감에 추증되었다고 한다.

정가신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나주목의 토성으로 나주 동강면 인동리에서 향공진사 정송수의 아들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여 충열왕 3년(1277) 보문각 대제가 되고 정녕공에 봉해졌다. 이어 죄사의대부를 거쳐 추서윤에 필적이 되고 충열왕 6년(1280)에 승지가 되었다. 충열왕 16년에는 사의가 되어 세자를 따라 원에 다녀온 이후, 성절사로서 3차례 원나라에 다녀왔다. 첨의찬성사 세자이사가 되었고 『천추금경록』을 저술하였다. 정엄은 이부상서, 정초는 호조판서, 정극기는 예조판서, 정훈은 증리조판서, 정식은 병조판서·지충추부사, 정국은 예조판서, 정여린은 경원도호부사, 정기수는 호조참의를 지내는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영광 입향조는 21세 후진(1663-1710)으로 1693년 경 나주에서 불갑면 녹산리 인산으로 입향하였고, 이어서 25세 둔곡 익원(1761-1820)이 영광읍 무령리로 입향하여 영광읍 무령리·연성리, 법성면 신장리 등지에 나주정씨 가문이 형성되었다. 익원은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송은 시영(1853-1919)은 부친인 남윤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를 따라 조모와 함께 불갑면 녹산리로 이거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1923년 쌍운리 송정마을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하고 있다.

나주정씨 문중의 중조인 정가신의 묘는 휴전선에 묶여 하는 수 없이 4월 5일 영산포 한선동(현 나주시 운곡동 안성마을)에서 망제를 지내고 있다.

동래정씨

동래정씨는 신라안일호장 정희문을 시조로, 고려보윤호장 정지원을 기세조로 하고 그의 세거지인 동래를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죽창집 上·下권 동래정씨의 영광 입향조인 죽창 정홍연의 시문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죽창공의 후손이 엮은 것으로 상하권은 시(詩)로 이루어져 있다.

정지원의 아들 정문도도 안일호장이었으며, 손자 정목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상서, 좌복사 섭태부경을 지냈고, 정목의 네 아들 정제, 정점, 정택, 정항은 모두 문과 급제하였다. 정항은 숙종 때 우사간을 거쳐 양광도와 충청도의 안찰사를 역임한 후 인종 때 지추밀원사, 예부상서, 한림학사 등을 지냈다. 그리고 정항의 아들 정서는 정과정곡을 지어 국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숭덕 2년(1637) 12월 15일 정홍연에게 내린 통정대부교지

동래정씨는 교서랑공파·첨사공파·호장공파가 있다. “겸손하고····남과 적을 삼지 않는다”는 가통을 이어 오면서 명문의 지위를 굳혀, 조선조에 17명의 상신, 대제학 2명, 공신 6명, 청백리 9명, 판서 이상 26명 등 19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정홍연에게 내린 교지

영광 입향조 죽창 홍연(1565-1639)은 집의공 난손의 현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이후 남하하여 백수 지산리에 우거하면서 강항, 신응망 등과 교류하며, 학문과 시율을 겨루고 화답하다가 광해 3년(1611) 46세의 늦은 나이에 음사로 선공감에 임명된 후 통예원인의, 상의원주부, 사복사주부 등을 거쳐 광해 8년(1616) 통훈대부로 제용감판관을 지내고, 거차·양천·동북·익산군수 등을 지냈다. 그는 인조반정 후 정치가 혼란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예전에 살던 백수면 지산리 가지산아래 가지마을로 낙향하여 광홀, 광신, 광윤 세 명의 아들을 두고 시률을 즐기면서 후손을 지도하였다. 인조 15년(1637) 통정대부로 당상관에 올라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의 관작을 받은 후 인조 17년(1739) 작고했다. 그의 손자 시화(1604년 생)는 처가의 인연으로 불갑면 용산으로 분가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지산사 지산사는 동래정씨 영광 입향조인 죽창 정홍연을 배향하고 있는 사우이다. 본래 사우는 영조 27년(1751)에 손자인 시화 등이 백수읍 지산리에 건립하였다. 그 후 3년 뒤에 유림 김옥 등 28인이 모여 가지사를 창건하고 정홍연을 배향하였다. 이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8년에 유림들의 발의로 복건 되었다. 이때 사우의 명칭을 지산사라 개칭하였다. 건물은 사우인 지산사, 강당인 가지서원, 내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정

유창수 기자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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