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 삼례 책마을에 가면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 잃어버린 아날로그 감성을 찾을 수 있다. 1960~1970년대 학술서적부터 최근 어린이책까지 10만여권을 실컷 보고 값싸게 살 수도 있다.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디지털에 사색을 빼앗기고 스마트폰의 와글거림 속에 온종일 갇혀 산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얼어붙고 책과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

전북 완주군에 있는 삼례 책마을로 가보자. 옛날 국어책에서 철수와 영이를 만나고, 산수책에서 덧·뺄셈을 배우다보면 번뇌로 가득 찬 세간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삼례읍은 만경강, 만경평야를 끼고 있는 곡창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산, 익산, 김제와 함께 양곡 수탈의 중심지였다. 슬픈 역사가 서려 있는 삼례에 3년 전 책마을이 들어섰지만 1920년대 양곡 창고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인적 드문 시골이었다. 다시 찾은 삼례는 온통 책세상이었다. 손때 묻은 서가에서 잃어버린 동심을 찾았고 빛바랜 책갈피에서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스무살을 만났다. 삼례 책마을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더듬으며 사색의 오솔길을 거닐고 왔다.

▶삼례는 책이다.

“이제야 오셨슈?” 서울 인사동에서 고서점을 운영하던 박대헌 삼례책마을 이사장(63)이 2개월 전 문을 열었다는 ‘책마을 문화센터’로 안내했다. 1960~1970년대 학술서적부터 최근의 어린이책까지 10만여권이 2층 천장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박물관이라고 해야 할지, 도서관이라고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마을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11개 서점이었다. 아니, 서점이라기보다는 책장 몇 개가 전부인 서가다. ‘노란집’ ‘삼인문학관’ ‘마리서사’ 등 간판도 재미있다. 미술·건축 서적들이 꽂혀 있는 책장에서 난데없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먹었다>는 재밌는 이름의 책도 튀어나왔다.

검지에 침을 묻혀가며 읽던 책은 향수를 불러왔다. <체 게바라 평전> <천국의 계단> <날개> 등 역사와 문학, 소설과 수필이 뒤엉켜 있는 서가에 한참 발길이 머물렀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뒤적이는데 표지는 촌스러웠지만 정겨웠다. 사회과학 서적을 모아둔 책장에도 시선이 꽂혔다. <전태일 평전> 등 5공화국 ‘금서’는 없었지만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 있어 다행이었다.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것은 LP판 서점에서였다. 앳된 소녀가 음반 표지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영화배우 장미희였다. ‘전축’이 없어 ‘판’을 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두꺼운 가요 악보집을 들출 때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교회 전도사님이 기타를 치는 모습은 왜 그리 멋있었는지, 지나간 10대 소년 시절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파는 책은 3000~1만원대가 대부분이다. 가격은 ‘주인장’ 마음이란다. 누가 어떤 책을 사갈까 궁금했는데 부모와 자녀들은 만화와 소설을 고르고, 학술 전문서적은 박물관 종사자나 학자, 전공자들이 찾는다고 한다.

문 앞에서 초등학생 아이가 엄마와 씨름하는 것을 보니 영락없이 만화책 때문이다. 순간 어린 시절 배꼽을 잡으며 읽은 만화 <맹꽁이 서당>이며 요즘 인기 많은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읽고 싶어졌다. 영어서점에서는 새 책이나 마찬가지인 단행본을 5000원에 팔았다.
 

▶얼어붙은 감성 녹이는 삼례문화예술촌

1920년대 지어진 양곡 창고에 들어선 책마을 문화센터

‘책마을 문화센터’ 건너편에 있는 문화예술촌으로 향했다. 고즈넉한 삼례성당을 지나자 ‘협동생산 공동판매 삼례농협창고’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1920년대 당시 벽면과 철문을 그대로 쓰는 ‘디자인 박물관’인데 반전이 따로 없었다. 첨단 기술과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이 만난 창작품 전시장이다. ‘김상림 목공소’는 목재 가구와 액자 등 생활 소품을 다룬다고 했다. “양달 밝은 곳에서, 대패질을 하다가, 종일 끌질도 하다가, 삼나무며 청솔잎 냄새도 맡고, 여울 물소리에 귀도 기울이다가, 속으로 들끓는 손바닥으로 어루만진 투박한 목각의 흔들림, 바람에 나부끼는 신의 속삭임 같은 것.” 목공소 앞에 놓인 황운헌 시인의 ‘소목의 하루’를 읽는데 추억이 아련했다.

양심껏 책값을 내면 되는 무인책방

‘책 박물관’ 입구 무인 책방에서는 독서 삼매경에 빠진 가족을 만났다. 인문학 서적부터 바둑잡지까지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책 뒤에 적혀 있는 가격을 양심껏 내면 된다고 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19세기 말 개화기부터 20세기 말까지의 출판물들이 즐비했다. 이광수의 <무정>, 김기림의 <기상도> 등 고서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위작 논란에 휩싸인 고 천경자 화백이 그린 이영도의 <춘근집> 책 표지는 붓터치가 투박했지만 정감 어렸다. 1960~1970년대 국어, 산수, 자연, 바른생활 등 ‘문교부’ 직인이 찍힌 교과서를 키득거리며 뒤적이는 바람에 나이를 들키고 말았다.

익살스러운 표정의 얼굴 작품을 전시 중인 VM아트미술관

쌀을 주제로 갖가지 얼굴 표정을 담은 VM아트미술관의 작품들은 익살스럽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단원 신윤복과 만난 3D 전시실의 작품은 신기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영국 웨일스 지방에 있는 세계 최초의 책마을 ‘헤이온 와이’가 떠올랐다. 낡은 창고 40여개를 헌책방으로 꾸며 세계적인 여행지가 된 것처럼 삼례도 지친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마을이 되지 않을까. 담장도, 경계도 없는 삼례 책마을에 가면 해가 뉘엿할 때까지 느리게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다.

▶여행 정보

☞ 가는 길

삼례 책마을에 가려면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익산역에서 전라선 하행선으로 환승해 삼례역에 내리면 된다. 서대전역에서는 삼례역까지 하루 6차례 기차가 다닌다. 삼례역에서 책마을까지는 걸어서 2분 거리다.

고속버스를 이용할 경우 우석대학교행을 타면 된다. 승용차로는 호남고속도로 삼례톨게이트로 나가면 된다.

삼례문화예술촌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매주 월요일, 설날, 추석은 휴무이며 입장료는 2000원이다.

☞ 먹을 곳

삼례 마을 사람이 운영하는 농가 레스토랑 ‘비비정’이 있다. 버섯전골·홍어탕·불고기 주물럭이 맛깔스럽다. 1인분에 홍어정식은 1만5000원, 버섯전골은 1만2000원이다.(063)291-8609. 채식 뷔페 ‘새참수레’ 삼례점도 괜찮다. 1인당 1만2000원. (063)261-4279

유창수 기자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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