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남 前 광주일보 편집국장

집을 수리하면서 벤자민 고무나무 화분을 분갈이했다. 8년 전 한 달 넘도록 화분에 물을 주지 못한 적이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몇 개 되지 않은 화분이 다 말라버렸다. 그래도 며칠 동안 물을 계속 주자 벤자민만 신기하게 새잎이 돋아났다. 그때 선인장과 함께 살아남은 유일한 화분이다. 대단한 생명력이구나! 볼 때마다 강한 생명력을 느낀다. 이번에 뿌리와 이파리를 정리해 새 화분에 담았다.

요즘은 화분 받침대에 바퀴가 달려있어 편리하다. 큰방 베란다에 있던 나무를 서재 책상 옆으로 옮겼다. 책상에 앉을 때마다 180cm 벤자민 나무가 올리브초록색 윤기나는 머리를 치렁거리며 나를 내려다본다. 벤자민의 꽃말은 무얼까? 32년이나 같이 살면서 꽃말도 몰랐다. 환경이 급변하면 잎을 다 떨어뜨리는 등 환경에 예민한 편이어서 꽃말이 ‘변덕쟁이’란다. 강인한 생명력을 그런 예민함으로 감추고 있었다.

별칭도 처음 알았다. ‘우는 뽕나무(weeping fig)’, 자세히 보니 반짝이는 방울 모양 이파리들이 아래로 처져 있는 모습이 곧 눈물이 떨어질 듯하다. 여러 번 자세히 보게 되니 예쁘고 더 사랑스러워진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 나태주의 ‘풀잎’ 시구절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진다. 시 이름은 ‘풀잎’이 아니고 <풀꽃1>이었다. 이어 <풀꽃2> 시구절도 알게 되었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 아, 이것은 비밀”. 벤자민은 지금까지 나에게 무엇이었나, 이웃인가, 친구인가? 이름부터 어려웠다. 처음엔 소리가 닮은 ‘벤자민 프랭클린’을 연상하며 외웠었다. ‘피뢰침 발명가, 100달러 지폐의 얼굴’ 벤자민 플랭클린과 벤자민 고무나무는 아무리 생각해도 연관을 찾기 힘들다. 가끔 ‘벤자민 플랭클린’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었다.

사람 이름은 이름 중 가장 외우기 어려운 이름이다. 뜻도 없고 이름에 그 사람의 색깔이나 모양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미당 서정주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하루아침에 1천 개씩 산 이름을 외우셨다고 한다. 산 이름은 그래도 뜻을 가진 게 많아 외우기 쉽다. 높고 높은 부처 무등등 무등산(無等山), 금강석 일만 이천 봉 금강산(金剛山), 말귀가 솟은 듯 마이산(馬耳山), 달이 솟아오르는 월출산(月出山). 무등산은 이름도 많다. 무덤이 많아 무덤산, 무지개가 피는 돌 무돌산, 상서로운 돌 서석산(瑞石山), 금강산은 계절마다 이름이 달라진다. 봄철엔 신록이 보석처럼 빛나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은 신선이 강림한다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은 단풍이 타오르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은 속살 그대로 개골산(皆骨山)이다.

세상살이는 이름을 아는 관계로 엮어지는 삶이다. 사람과 사람 관계는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잘 부르는 사람이 이끌어간다. 자연과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자주 만나 자주 이름을 불러야 좋은 인연이 생긴다. 아파트 1층 현관 옆에 서 있는 10m가 넘는 계수나무는 매일 아파트를 드나들 때마다 만난다. 이웃보다 가깝다. 투명한 하트모양의 잎이 달콤한 사탕 냄새를 풍긴다. 별칭이 카라멜 나무다. 꽃말은 ‘승리의 영광’이다.

벤자민은 서재에 갈 때마다 언제나 내 곁에 다가선다. 풍성한 머리를 자랑하듯 풀어헤치고 노트북 앞에 앉은 나를 내려다본다. 몇십 분, 몇 시간 잎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꼿꼿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우는 뽕나무’, ‘변덕쟁이’라고 부를 분위기가 아니다. 벤자민에겐 친구, 연인보다 멘토, 선생이란 호칭이 더 어울린다. 분갈이하면서 벤자민은 내 ‘인생 멘토’가 되었다.

김종남 前 광주일보 편집국장(언론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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