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근 편집위원장

광주에서 택시를 탔다. 뉴스가 나왔다. ‘박근혜’란 이름이 나왔다. 태극기가 나왔다. 기사님의 “모지리”로 시작한 육두문자는 한참이나 계속됐다. “진즉에 사과하고 하야 했으면 형무소도 안 갈 것인데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고 있다”는 원망 섞인 목소리는 격앙됐다. 목소리가 한탄조로 바뀐다. “태극기를 대하기가 민망하다. 성조기는 왜 들고 나오나” 하는 내용이다. 나, 아니 우리 모두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

태극기는 나라의 상징이다. 나라 잃은 시절 가슴에 안고, 장롱 깊은 곳에 숨겨두고 나라 찾을 날을 기다렸다. 빈부와 신분, 배움이 많건 적건 그 앞에서 모두는 경건한 자세였다. 독립투사의 가슴에 안긴 태극기는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국정농단을 변명하고 감추는 데 태극기를 앞세우는 것은 국기 모독이다. 국정농단보다 더 엄중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태극기 대하기가 민망하지 않겠는가.

성조기를 든 속셈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이 미국의 속국이란 말인가. 박근혜 정권을 지키는 데 미국이 나서달라는 메시지인가. 98년 전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3·1독립선언서) 외친 선열들게 죄송한 마음 금치 못한다.

태극기는 자랑스러웠다. 감격스러웠다. 그러던 태극기가 요즘 부담스럽다. 나라를 결딴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집단의 상징물로 사용하고 있어서다. 소중한 촛불을 태극기로 꺼버리겠다고 달려들고 있어서다. 간신배들이 지은 죄를 덮는데 사용하고 있어서다. 고백컨대 이번 3·1절엔 태극기를 마주하기가 부끄러웠다. 아니, 부담스러웠다. 평생 태극기를 마주하고 이런 감정을 가진 적이 없다.

‘태극기 집회’는 국정농단의 죄인들을 애국자로 포장하고 있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켜든 촛불을 태극기로 꺼버리겠다고 한다. 그들을 지켜보기가 민망하다. 어떻게든 벌을 면해보겠다고, 부와 권세를 계속 누려 보겠다고 발악하는 모습이 분노를 불렀다. 미웠다. 이제는 가엽다. 불쌍하다. 나라가 결딴날 판에 간신배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군중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어깨동무하고 살아갈 이웃이기 때문이다.

촛불은 늘 힘없는 소시민들의 정의감으로 켜졌다.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숨진 효순·미선의 죽음에 항의하며 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며 켰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면서도 켜졌다. 시위가 아니었다. 비폭력적 문화제로 승화 시켰다. 그래서 이름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거기에는 김평우도, 김진태도, 윤창중도, 김문수도, 문창극도, 이인제도, 서석구도, 김경재도 없었다. 지금 광화문에도 없다.

찢기고 갈라져 골 깊어진 갈등은 이제 대 폭발의 시기를 맞고 있다. ‘대 폭발’의 끝은 새로운 질서다. 새로운 대한민국이다. 화합이다. ‘대 폭발’이 일어나면 “피로 물들 것이”이라는 협박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라진다. 태극기 집회도 사라진다. 망령(亡靈)들의 파티는 어둠이 사라지면 끝나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소시민들이 펼치는 촛불 문화제는 새로운 대한민국이 완성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끝날 때까지. 꿈과 기도가 이뤄지는 새벽을 기다리는 불꽃은 이 나라 곳곳을 밝게 비추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밝은 마음으로 태극기를 바라볼 날을 기다린다.

조일근 편집위원장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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