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이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에 휴전이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침략을 받은 우크라이나보다 침략을 한 러시아와 미국이 더 적극 나서고 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백악관에 찾아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자기 나라 안보부터 먼저 보장해달라고 말다툼하는 장면이 공개되는 외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지자 트럼프는 무기 공급은 물론 군사적 정보 제공을 중단해 버렸다. 러시아는 이 기회를 틈타 파병된 북한군과 함께 우크라이나군이 점령하고 있던 쿠르스크(러시아 영토)를 공격해 영토 상당 부분을 되찾았다. 우크라이나군이 까막눈이 되자 젤렌스키는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사과하고 꼬리를 내렸다. 군사적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준 구체적인 예였다.

꼬리 내린 우크라
세계는 팔짱을 끼고 휴전협상을 지켜보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게 빼앗긴 크림반도와 20%의 국토를 회복하는 게 목표이다. 미국은 ‘아무튼’ 전쟁을 중단시키는 게 최상의 목표이다. 미국기업이 들어가 광물자원(희토류)을 확보하고, 에너지 공급체계에도 미국이 개입하려 한다. 미국기업이 우크라이나에 자리잡으면 미군이 주둔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어 우크라이나 안전를 보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러시아 역시 현 상태에서 휴전하면 우크라이나 영토 20%를 확보하는 것이므로 밑질 것이 없다. 러시아도 전쟁여력이 떨어져 북한군까지 끌어들인 마당이므로 휴전하면 보충할 시간을 벌 수 있다. 또 푸틴 대통령은 과거 소련 영토의 회복이 목표인데 점령지를 확보한 가운데 휴전이 성립되면 그의 야망이 어느 정도 달성된 셈이고, 소련연방 해체(1991년) 이후 독립한 발트3국과 독립국가연합(CIS) 12개국에 대해서도 경고하는 효과를 얻게된다. 국제사법재판소(ICC)에 제소되어 있는 그의 죄도 본의아니게 미국의 도움으로 당분간 보호받을지도 모른다.

‘패싱’은 배제·왕따 의미
패싱(passing)은 ‘지나가다’ ‘통과시키다’는 뜻이다. 그런데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를 방문하면서 중국만 들리고 일본을 찾지 않자 일본 언론들이 ‘재팬패싱(Japan passing)’이라고 표현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면서 패싱은 ‘배제하다’‘건너뛰다’‘소외’‘왕따’를 뜻하는 콩글리시가 됐다. 심지어는 5·18기념식때 문재인 대통령 부인인 김정숙 여사가 당시 황교안 야당 대표와 악수하지 않고 지나갔다고 하여 ‘악수패싱’이란 단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패싱’과 휴전협상에 관해서는 우리나라도 일찌감치 경험한 바 있어 우크라이나 휴전협상 결과를 짐작해볼 수 있다.

‘패싱’에 시달려온 한국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터졌다. 초기에는 한국이 낙동강전선까지 밀렸으나 유엔군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됐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에다 전선(戰線)이 고착될 조짐을 보이자 전쟁 당사자인 미군과 북한·중국군 모두 휴전을 바라게 됐다. 미국은 3차 세계대전을 걱정했다. 침략을 당했던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만 북진통일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며 이를 거부했다. 우여곡절 끝에 유엔군은 자유의사에 의한 포로송환을, 북한은 당사국으로의 일괄 송환을 주장했다. 1953년 협상이 마무리되어가자 휴전을 반대해 온 이승만은 6월 18일 북한으로 귀환을 거부하는 27,000명을 풀어주는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의 체결과 경제원조 등을 약속하며 이승만을 달랬다. 이에 따라 한국이 빠진 정전협정(7월 27일)이 체결된 직후 서울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되고(8월 8일) 양국 국회의 비준을 거쳐 1954년 11월 18일자로 정식 발효됐다.

우리는 수백 년간 ‘한국패싱’을 당한 가슴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발생 5개월 뒤인 9월부터 일본군은 조선을 제쳐둔 채 파병된 명군(明軍)에게 한반도 분할안을 3차례에 걸쳐 제안했다. 조선정부와 중국정부가 거부했지만 조선에게는 치욕이었다.

윤석열의 정치도 ‘국민패싱’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탄핵정국도 ‘패싱’과 관련이 있다. 국민은 문재인 정권이 부동산정책에 실패하자 윤석열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가 시원치 않자 집권 2년 뒤에 있은 22대 총선에서 야당을 다시 다수당으로 뽑아 견제하도록 했다. 그렇게 되면 윤석열은 당연히 국민의 뜻에 따라 국회와 타협하면서 정치를 풀어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을 ‘입법독재’로 몰아붙이고, 선출되지 않은 검찰권력을 정권유지에 활용(부인과 측근들에 대한 수사 외면 의혹)하는 한편 군대까지 동원해(헌법, 계엄법 위반혐의) 국민을 ‘패싱’했다.

우크라, 타결 더 어려울 수도
그렇다면 ‘패싱’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국력이 약해지면 ‘패싱’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6·25전쟁때 당사국인 한국이 빠진 정전협정 회담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돼 2년간 본회담 159회와 각종 회담 765회를 가졌다. 그 긴 시간동안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고지전을 벌이느라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6·25전쟁은 결과적으로 전쟁 전과 비슷한 영토를 확보하고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루한 협상을 해야만 했다. 우크라이나는 20%의 영토를 빼앗긴 상황인데다, 간접적으로 협상을 해야 할 형편이어서 6·25전쟁 때보다 타결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둘째, 강대국은 어떤 환경에서든 자기나라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국이 6·25전쟁 1년 전 주한미군을 철수하고서도 즉각 개입한 것은 2차대전 이후 침체되어 있는 미국경제의 부활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로 해서 전범국인 일본도 떡고물이 떨어져 경제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우크라이나 휴전협상에서 광물자원 협약을 요구하고 있는 것 역시 ‘미국의 보호’라는 명분과 ‘미국의 이익’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트럼프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100억 달러(14조원, 2026년에 1조6천억원 예정), ‘머니머신’ 한국의 대미투자, 무역수지 불균형 시정 등을 요구하며 주한미군 철수, 한국패싱-북미정상회담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우리도 군사적 정보 상당부분을 미국에 의지하고 있다. 미국이 한·미·일 삼각안보동맹을 요구할 때 대처방법에 대해 국민들은 지혜를 모아야 한다.

‘패싱’ 경계해야
셋째, ‘안정’과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1950년대까지 풍요로운 시대를 보냈으나 이후 전쟁개입 등으로 누적된 재정적자, 무역적자가 쌓여가면서 경제적·군사적 일극체제가 약화되고 G2시대, 신냉전체제가 다시 형성됐다. 그러다 보니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사로 등장하게 됐다. 한국에서도 국민들은 여야 간의 정권교체가 3차례나 이루어졌으므로 민주체제가 정착된 줄 알았다. 그러나 최고의 공복(公僕)을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제는 성장이라는 환상에만 머무를 게 아니라 공동체를 수시로 점검하고, 시대에 동떨어진 요소를 과감히 개혁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넷째, 패싱은 불안정한 국제적 환경, 군사·경제적 대결, 고립주의 바람 등이 불어닥칠 때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로 빚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정한 국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패싱되지 않으려면 국제적으로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확보해야 한다. 대내적으로도 한 사람의 리더십에 의존할 게 아니라 집단지성과 국민여론통합을 바탕으로 자력갱생에 노력해야 한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나 분단국인 한국은 지정학적인 취약점까지 가지고 있으므로 특히 더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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