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후 무얼 하나? 돈벌이 이야기는 아니다. “정년이후에는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하라”는 충고가 생각났다. 고심 끝에 한문공부를 시작했다. ‘한문은 젊은이들에게 뒤지지 않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10여 년이 흘렀다. ‘자기이름을 한자로 쓰지 못하는 대졸생이 부지기수이고 개중에는 한자로 써놓은 자기대학 이름조차 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10년 전 개탄(慨歎)은 지금 얼마나 바뀌었을까.

한문공부는 머리 녹슬지 않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아 좋았다. 글 쓰는데도 도움이 컸다. 더 큰 보상은 일 없는 노인에게 돈보다 더 중요한 자긍심을 준다는 점이다. 한문을 모르는 유학파 젊은 교수도 많다. 사찰에 붙은 주련, 옛 정자 현판들, 지명(地名)에 얽힌 스토리들, 또 동양화 화제(畵題)들, 서예작품들, 한자는 어디서나 만나게 된다. 대한민국은 2천5백여 년 동안 쌓아 온 위대한 한자문화 보물창고이다.

‘빛고을光州의 어머니’ 無等山은 이름풀이가 많다. 불교색이 짙은 ‘無等等’에서 나왔다는 설에 따르면 ‘등급을 매길 수 없이 높고 높은 부처 같은 산’이 된다. 조선시대 <광주읍지>는 ‘無等山에 절이 50여개, 암자는 999개나 있다,’고 했다. 무등산옛길을 걸어 元曉계곡에 들어서면 義湘峰, 觀音峰이 병풍처럼 둘러친 곳에 元曉寺가 자리 잡았다. 콸콸 솟아나오는 甘露井약수를 한 바가지 마시고 계단을 오르면 藥師殿, ‘없을 無’자가 3개나 들어있는 주련이 눈에 들어온다. “無去無來亦無住” ‘감이 없고 옴이 없으니, 머뭄 역시 없다’ 그런 뜻 같다. 梵鐘閣에도 주련이 있다. “聞鐘聲煩惱斷” ‘종소리 듣고 번뇌를 끊어라’는 말씀인가. 마침, 종이 울린다. 번뇌가 밀려난다.

그런데 나의 한문배우기는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 사서삼경 중에서도 제일 어렵다는 주역(周易), 공자님도 말년에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韋編三絶) 정도로 탐독하셨다는 주역이 시작이었다. 우연히 친구 따라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전남대 종교인문학 강의를 듣게 되면서이다. 주역 뜻이 어렵기도 하고 주역 괘가 실생활과 연관되지 않아 재미가 붙지 않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그 다음은 진짜 서당이었다. 맹자와 중용, 고문진보를 읽었다. 이곳도 쉽지 않았다. 잘하는 학생들이 많아서인지 백발의 훈장님은 이야기책 읽듯 줄줄 읽어나가시고 한시도 써보라고 독촉하신다. 2년 전에야 초중급 한문교실을 찾을 수 있었다. 推句, 千字文, 擊蒙要訣, 明心寶鑑을 배운다. 조선시대 5살 어린이들이 읽었다는 千字文이 이렇게 어려운 한자투성이 인가, 이렇게 깊은 철학적 시들이 많았던가!

그중에서도 격몽요결(擊蒙要訣; 蒙昧한 아동의 지혜를 啓蒙하는 要訣)은 감동 자체였다. 과거시험에 9번이나 장원(九度壯元)한 ‘공부의 천재’, 栗谷선생이 42세 때(1577년) 남긴 ‘공부비결서’라 할만하다. “人生斯世에 非學問이면 無以爲人이니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데 있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로써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가 없다.; 金星元 譯)” 첫 문장이다.

‘사람다운 사람(爲人)’이 되기 위해 무얼 해야 하나? 먼저 뜻을 세우고(立志章) 어떻게 책을 읽고(讀書章), 또 어떻게 사람을 대하고(接人章), 처세해야하는지(處世章) 세세히 서술한다. 특히 독서장, 책 읽는 요결은 칼끝처럼 날카롭다. “구절마다 반드시 실천하는 방법을 탐구할 것이다. 만일 입으로만 읽을 뿐 마음에 체험하지 못하고, 몸으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 일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而每句 必求踐履之方 約口讀 而心不體 身不行 則書自書 我自我 何益之有)”

‘입으로만 읽지 말고, 반드시 마음으로 체험(心體)하고 몸으로 실행(身行)하라’. 정년이후 한문공부, 잘한 선택임에 틀림없다. ‘심체(心體)신행(身行)’하는 평생공부, 이제 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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