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사장

얼마 전 류시화 시인의 산문집에서 ‘퀘렌시아(Querencia)’라는 단어를 접했다. 스페인어로 ‘소가 싸우다 기운을 되찾는 장소’라는 뜻이란다. 소만이 알 수 있는 그 장소는 어려울 때의 피난처이자 힘들고 지칠 때 기운을 얻는 곳이다. 작가는 ‘자아 회복의 장소를 찾아서’라는 부제를 달아 사람에게도 퀘렌시아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 현대인들은 앞만 보고 달리다 어느 순간 신체적·정신적으로 탈진하는 번아웃(Burn out) 증상을 경험하고는 한다. 잠시도 식힐 시간을 주지 않고 오로지 불태우기만 하면 고장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소에게도 자신만의 휴식 장소와 시간이 필요한데 사람은 오죽할까.

개인적으로 나만의 퀘렌시아를 경험하고 변화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지난 2000년 환경부에서 마치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일하다 아프리카에 파견됐다. 갑작스레 여유로운 시간들을 마주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한국에서처럼 저녁마다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치안이 좋지 않아 밖에 나가는 일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아프리카 생활은 인생을 돌아보는 기회로 작용했다. 척박한 환경의 아프리카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간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바쁜 삶이 처음으로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 퀘렌시아를 발견한 뒤, 현재 근무처인 수도권매립지를 시민들의 퀘렌시아로 만들기 위해 세심하게 살폈다. 체육공원과 환경생태공원을 조성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나들이 행사를 마련해 매립지를 수도권 시민의 쉼터로 탈바꿈시켰다. 다행스럽게도 방문객은 매년 늘고 있고, 드넓게 펼쳐진 야생화 꽃길과 흐드러지게 핀 국화꽃밭은 특히 인기를 끈다.

우리 영광군도 많은 이들에게 의미 있는 휴식을 선물할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퀘렌시아, 즉 쉼터의 요건은 아늑하고 편안하면서도 휴식은 미식이라는 말처럼 입맛을 충족시킨다면 금상첨화겠다. 엄마 품 같은 따뜻함과 엄마 손맛이 여전한 내 고향 영광은 그런 요건을 갖춘 곳으로 손색이 없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 정도로 황홀한 백수해안도로는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절경과 노을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드라이브 코스다. 해안도로 근처 영화 마파도 촬영지인 동백마을에서 욕쟁이 할머니라도 만난다면 그 재미는 배가 된다. 백사장·소나무숲·카라반·풀장이 어우러진 가마미해수욕장과 송이도의 몽돌해수욕장. 갯벌체험에 인상적인 낙조를 볼 수 있는 두우리. 한국의 10대 아름다운 숲으로 산책하기 좋은 ‘숲쟁이 꽃동산’.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로 국내 유일 4면 불상 등 다양한 불교문화체험이 가능한 법성포까지. 휴식 공간은 차고 넘친다. 게다가 법성포 굴비정식은 미식의 고장 남도의 맛을 온전히 품고 있다.

훌륭한 국민 쉼터가 되면 지역에 활력이 생기고 경제적 가치로까지 이어진다. 이는 젊은이들의 서핑지로 떠오르며 군 자체가 활력을 얻고 있는 양양군과 5개 조선소 폐업에도 관광수입이 위기를 막고 있는 통영시의 사례에서 입증되고 있다. 영광군도 이미 그 가능성이 충분하다. 여러 완성된 조각들을 잘 잇고 붙여 외부와의 통로를 넓히되, 지나가지만 말고 머무르도록 하는 가능성은 현실이 된다. 해파랑길·지리산둘레길처럼 인근 자치단체들이 머리를 맞대 색다른 쉼의 공간을 내놓듯이, 함평·장성 등과의 힘을 합하는 방법도 모색해볼 만하다.

이재현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사장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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