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영광백수중 교사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씨는 마치 인쇄 활자인 듯 고르고 정갈했다. 십 수 년 전 제자로부터 온 편지를 한 자 한 자 눈으로 어루만지며 읽어 내려갔다.

‘저의 중학교의 추억을 지금껏 소중하게 간직해 주시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감동입니다. 이제는 그 ‘보물’이 ‘최종’이라 선생님의 표현을 읽으면서 그립고 따뜻한 마음에 정말 소중하게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어쩜 파스텔의 색깔까지도 여전히 남아있도록 간직해주셨는지요.'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온지가 꽤 되어 집수리 대신 실내 구조라도 바꾸고 싶다는 생각에서 묵은 짐들을 정리하고 새롭게 변화를 주기로 마음먹은 지난 여름방학.

누렇게 변색 된 데다 맞춤법마저 오래 전의 것인 책들, 누군가의 생애를 정리한 기념집, 결코 안 볼 것 같은 영어 문법책들을 뽑아냈고, 일 년에 한 번이나 입을까 말까한 옷가지, 살이 빠지면 입을 것이라고 장롱에 고이 모셔둔 옷들,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것들을 빼내어 버리고 또 버렸다. 그뿐인가, 이전 학교에서 발간했던 학교신문과 교지, 참관 수업 때 가져온 학습지도안, 혹은 연구보고서, 언젠가는 쓸모가 있으리라 모아둔 수집벽을 탓하며 후회 없이 내다버렸다.

그러다가 <학생 작품>이라는 두툼한 파일집을 발견했다. 그림을 곁들인 독후감상문, 책 광고, 나만의 책표지, 모방시, 희곡을 만화로 그린 모둠 활동지, 백일장 대회 수상작들, 색이 바랠까봐 코팅해서 정리해둔 학생들의 수행평가 우수작들이었다. 이미 수업 중에 견본으로 제시한 것들을 제외한 우수작의 뒷면에는 학생의 이름과 함께 A+라고 써 있었다.

이십 년이 다 되는 세월을 원형대로 간직하고 있는 한 권의 파일집. 그래, 내가 수업시간에 이런 활동들을 했었지, 이 성실했던 제자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이 시절 자신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러다가 순간, 그 시절의 꿈 조각들을, 그들의 추억을 내가 빼앗아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 되어있을 옛 제자들에게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런데 용케 그 중에 한 학생과 연락이 닿아 주소를 확인하고 손 편지를 주고받다가, 그 때의 작품들을 모두 모아 소포로 보냈었다. 박제로 간직되었던 아름다운 작품을 돌려받은 제자는 심지어 기억조차 못한 자신의 물건에 감격하여 답장을 보내왔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학생의 몇 작품을 학교에서 발견해 다시 보내주면서 너의 작품은 이것이 ‘최종’이라는 말을 썼었다. 그런데 그 제자가 곱디고운 편지지에 정성스럽게 답을 써 보내온 것이다.

제자에게 보낸 편지 글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퇴직하기 전 너희들의 모교에 모월 모일 모시에 모여 주면 좋겠다. 그런다면 내가 너희에게 알려주리라. 너희들이 얼마나 예뻤고, 순수했으며, 사랑스러웠던가를. 모든 일에 정성스러웠으며 선생님의 가르침에 긍정으로 임했으며, 작은 것에도 눈물을 흘릴 줄 알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때의 작품들을 돌려주며 얼마나 자랑스러운 재주꾼들이었는지, 얼마나 감성 깊은 소녀들이었는지, 선하디 선한 학생들이었는지 칭찬해주고 싶다. 그리고 내게 저당 잡힌 물건들을 미안해하며 돌려주고 싶다’라고

그 제자의 편지에 들어있는 것이 더 있었다. 자잘한 꽃들이 수줍게 인쇄된 손수건 두 장, ‘언니가 취미로 미싱을 하는데 손수건을 만들었어요. 언니도 선생님의 편지를 함께 읽으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선생님께 이 손수건을 전하고 싶다고 해서 전해드립니다.’

나는 뭉클한 마음이 되어 손수건을 펼치며 속으로 외쳤다. ‘아, 어찌 내가 이 소중한 손수건을 사용할 수 있겠니’

“옛 제자들아, 너희 꿈 조각들을 내가 간직하고 있단다. 다시 그 시절의 모교로 모여 주겠니?”

김미경 영광백수중 교사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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