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재 아시아문화학회 부회장 (언론인)

세상은 지금 만추(晩秋)…늦가을이다.

말 그대로 가을이 고갯마루에 이른 셈이어서 가을정취를 맛보려는 사람들로 온 산하가 부산하다. 형형색색 절정의 단풍도 얼마 후면 하나둘씩 잎새를 지우다가 메마른 겨울나무로 비탈에 서서 첫눈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변화엔 처음과 끝이 있게 마련이다. 일출은 노을로 종말을 고하고, 새봄의 파릇한 새싹들도 붉은 단풍으로 숨을 거둔다. 그런 상념 때문인지 늦가을의 산하는 절정을 향해 안간 힘을 다하는 생명의 마지막 몸짓처럼 다가서기도 한다.

지금은 장관의 신분이 된 시인 도종환은 만추를 이렇게 노래했다.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깊어갑니다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가을의 산하만 이렇게 제 빛깔로 깊어가는 것은 아닐 터다. 가을을 맞는 사람들도 함께 깊어간다. 해마다 스쳐 보내는 일상의 절기이지만, 그때마다 가을은 또 다른 사색의 시간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간다. 그래서 봄날의 화사함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줬다면, 뭇 생명들이 마지막 향연을 펼치는 가을은 우리에게 지혜를 안겨주는 계절일 것이다.

지금의 고인이 된 영화감독 이만희는 짧고도 숙명적인 사랑을 ‘만추’라는 제목의 영화로 그려냈다. 가슴 절절하게 아름답지만 끝이 예고된 사랑을 겨울을 눈앞에 둔 만추에 빗대어 풀어낸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역사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철학의 뜻이 분명해진다는 비유이지만, 경황없이 한 해를 보낸 저문 늦가을에 새겨볼만한 경구이다.

박호재 아시아문화학회 부회장 (언론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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