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재 아시아문화학회 부회장 (언론인)

지난 주 금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점심약속을 했던 지인이 시간을 넘기더니 전화가 왔다. 쩔쩔매는 목소리로 아무래도 점심을 같이 못하겠다고 했다. 다음 주로 일정을 다시 잡고 까닭을 물었더니 구청에서 작은 사업을 하나 받았는데 오늘까지 정산서류를 내야 하기 때문이라 했다. 일찌감치 서류를 냈지만 작은 착오가 생겨 다시 하다 보니 마감에 쫓겼다는 것이다.

별 생각 없이 얼마짜리 사업이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듣고 보니 괜한 질문이었다. 많이 머뭇거리다가 지인이 풀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300만원…. 마음이 좀 아팠다. 사실은 공단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는 후배인데 교회 형편이 좋지 않아 부업거리로 작은 사업들을 지자체에 신청해 어렵사리 생활을 꾸려왔기 때문이다.

큰돈이네, 하면서 농담을 던지고 전화를 끊었지만 편한 기분은 아니었다. 물론 지인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긴 했다. 필자 또한 한 때 문화기관에 근무하면서 지원사업을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액수가 크든 적든 사업비 정산이란 절차가 보통으로 힘든 게 아니었다. 1원 짜리 하나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부가세 계산에 날짜가 좀 걸리는 사업이면 그동안의 이자까지 환산해 입출이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하기에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세상의 을들은 이렇듯 국민 혈세를 쓴다는 명목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것도 당연히 감당해야 할 지엄한 의무인 양.

박근혜 정권 문고리 3인방이란 이들에게 국정원이 거금을 상납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매년 수십억 원에 달했다 하니 입이 벌어진다. 정산은커녕, 지출 영수증 하나 제시하지 않아도 문제를 삼지 않는 예산이라니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른 바 특수활동비…나라를 위해 어떤 특수 활동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거리낄 게 없다면 왜 쓰임새를 밝히지 않는지 납득할 수 없다.

돈을 주고받은 정황도 무슨 범죄영화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다. CCTV가 없는 한적한 산길이 ‘공공을 위한 특수활동비’의 거래 공간이 됐다.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은 이런 심부름을 하고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명절 떡값 명목으로 매년 1억 2천만 원 정도를 받았다 한다. ‘김영란법’이란 게 만들어져 보통의 국민들은 명절 선물 주고받는 일에도 액면을 따지며 노심초사하는 와중에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김영란 법 제정에 일조를 한 일부 야당 국회의원 나리들이 지난 정권에도 있었던 관행이라며 정치보복 운운하며 수사에 딴지를 거는 모습이다. 법이 안중에 없던지, 국민이 안중에 없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적폐청산 작업이 깊이를 더하며 차마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싶은 참혹한 진실들이 하나씩 발가벗겨지고 있다. 사람이 아닌, 금수들이 통치한 나라에서 살아왔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반동의 기미도 벌써 태동하는 중이다. 개혁의 피로감을 들먹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 정치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명목으로 적폐를 덮고 넘어갔던 지난 민주정부들의 말로를 돌이켜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땅은 여전히 300만원 정산에 쩔쩔매는 ‘보통의 국민들’과 수억 원의 특수활동비를 쓰고도 영수증 하나 제출하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국민’으로 계층화돼있다. 이 보이지 않는 계급의 장벽을 거둬내기 위해서라도 적폐청산은 무한대로 진행돼야 할 것이다.

박호재 아시아문화학회 부회장 (언론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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