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들르지는 못하지만 수년 전 나는 내 고향 영광의 백수 해안도로를 탐방한 적이 있다. 들리는 소문대로 참 아름다웠다. 해안의 부서지는 하얀 파도, 절벽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는 소나무, 포구의 그림 같은 어촌, 거기다가 수평선으로 막 떨어지는 황혼녘의 해는 얼마나 황홀하게 보였던가. 운명의 장난으로 비록 내 오래 살지는 않았으나 고향 영광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지를 그 때 나는 비로소 실감하였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영광이라는

도시의 홍보는 물론 관광산업에 끼치는

경제적 효용가치도 적지 않으리라

영광군에서 칠산 앞바다가 보이는 이 아름다운 백수 해안도로의 산자락 어느 한 언덕에 한국의 유명 시인들을 위해서 시비 등을 세운 공원 형식의 수목장지(樹木葬地)를 하나 만들어 주면 어떨까. 비좁은 국토의 현실로 인해 요즘 우리나라에서 매장은 차츰 기피되고 있는 추세이니 시신을 화장해 골분을 수목에 뿌려주면 나무의 영양 공급이나 국토의 효율적 이용이라는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보다는 아마도 유명시인들을 기억하거나 추모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영광이라는 도시의 홍보는 물론 관광산업에 끼치는 경제적 효용가치도 적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기서 수목장이란 유골함을 나무 밑둥에 매장해서 땅을 훼손시키는 따위의 방식이 아니라 골분을 흙에 뿌려 바로 사라지도록 만드는 방식을 뜻한다.

시인은 그가 절대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언어가 그렇듯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적 생사관으로 볼 때 인간이란 죽으면 누구나 서천 서역(西天西域) 땅으로 간다고 하니 해 지는 서쪽 바다를 바라다보며 아름다운 조국의 산 언덕에 묻힌 이 나라 시인들이라면 죽어서라도 또한 얼마나 당신들의 국토를 사랑하는 영혼이 되랴.

‘솔베이지 송’ 작곡가 그리그가 태어나고 묻힌 베르겐

오세영이 본 베르겐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서북쪽 400km 떨어진 바닷가에 베르겐이라는 도시가 있다. 좀 식견을 갖춘 세계인이라면 수도 ‘오슬로’나 ‘노르웨이’라는 나라는 잘 모를지언정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조그마한 도시이다.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업이 발달해서 돈이 많기 때문도 아니다. 이곳에서 이 나라 대통령이나 총리가 나와서가 아니다. 교외(郊外)에 단 한사람, 우리에게도 「솔베이지 송」으로 널리 알려진,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Edvard Grieg1843-1907)가 태어나고 묻힌 곳이기 때문이어서 그러하다.

10여 년 전 나는 인근의 나라 스웨덴에서 있었던 한 학술행사에 참여할 기회가 있어 돌아오는 길에 그 베르겐을 들른 적이 있다. 그리그의 생가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담하게 지어진 생가였다. 꾸미지 않고 실제 그가 살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소박하게 보여주는 집이었다.

손때가 묻은 피아노를 보니 금방이라도 그가 나타나 자신의 피아노 조곡을 연주해 들려줄 것만 같았다. 그 옆의 기념관도 우리나라의 그것처럼 작위적으로, 혹은 과시용으로 꾸미지 않아서 좋았다. 그렇지만 경내만큼은 백인‧황인‧흑인 등이 어우러진 관람객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거기서 내가 한 가지 더 경탄했던 것은 그의 무덤이 바로 생가가 서 있는 절벽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피욜드 만이 바라다 보이는 해안, 수직으로 높이 솟은 낭떠러지의 중간에 조그마한 굴을 파서 그 안에 그의 시신을 안치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들이 그를 가리켜 흔히 ‘노르웨이 국민음악가’라 부르듯 그가 누구보다도 자신의 조국 노르웨이를 사랑한 사람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고….

사실 그의 작품은 노르웨이인의 감성과 노르웨이 민속문학에 토대를 두고 작곡한 것이 대부분이다. 알고 보니 그는 생전에, 죽어서도 자신은 아름다운 조국을 바라다보고 싶으니 자신의 시신을 꼭 북해의 피욜드가 보이는 절벽에 묻어 달라 했다고 한다.

트롤 하우겐(Troldhaugen)이라 불리는 그리그의 생가는 바닷가 근처의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피아노 협주곡>과 <페르귄트>등의 대표작을 남긴 그리그가 사용했던 피아노, 악보, 편지, 가구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규모가 작은 편이다. 그리그 생가의 별실에서는 지금도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공연이 개최되고 있다. 절벽 중간에는 그리그와 그의 아내를 합장한 묘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베르겐은…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곳, 모든 걸 다 보지 않아도 오롯이 마음에 머무는 도시 베르겐은 낭만으로 그득한 공간이다. 북유럽을 여행해 본 여행자라면 누구나 다시 찾고 싶은 도시 베르겐, 고풍스러움과 동화적 낭만이 어우러진 도시 베르겐은 오랜 추억의 품 안으로 들어와 충만한 여유와 포근함을 전해준다.

도시의 맑은 공기도, 오랜 도시의 은근한 여유로움도, 이 공간 속에 차분히 머물고 싶어지는 이유다. 여행자의 마음을 치유하는 회복의 힘, 노르웨이의 숲과 바다 또한 그곳에 있다. 마치 그림 같은 산등성이 아기자기한 집들의 손짓, 동화 속 주인공이 되어 뛰는 가슴 부여잡고 베르겐의 오랜 세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되는 곳이다.

베르겐은 오슬로에 이어 노르웨이 제2의 도시로, 적은 인구에도 활력이 넘쳐나는 곳이다. 1070년 올라브 퀴레 왕에 의해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는 노르웨이의 수도이기도 했다. 오슬로에 비해 공기가 맑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간직한 베르겐은 주민들의 표정에서도 노르웨이 최상의 도시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베르겐의 얼굴이자 심장인 브뤼겐, 중세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오세영의 영광을 주제로 한 '시'

법성포(法聖浦)

해마다

음(陰)사월 초(初) 파일(八日),

불갑사(佛甲寺) 범종소리 은은히 들릴 무렵

유독 법성포구 해안에만 너울이 이는 것은

칠산 바다 조기떼가 일제히 몰려와

기뻐 날뛰면서 춤을 추기 때문이다.

세상은 고해(苦海)라는데

일엽편주(一葉片舟) 건너는 법 최초로 일러준 땅,

그 법성포.

해마다 음 사월 초파일

수평선너머 아득히 해가 질 때

유독 법성포구 앞바다만 고운 놀이 지는 것은

제석천(帝釋天) 비천(飛天)들이 하늘에서

향그러운 꽃비를 내리기 때문이다.

삶이란 무명(無明) 속 길이라지만

등불 환안히 밝히는 법 최초로 일러준 땅,

그 법성포.

해마다 음사월 초파일

바람이 조용하게 잦아들 시간

유독 법성포구 물소리만 아름답게 들리는 건

백수(白岫) 갯벌 철새 떼가 무릴 지어 날라와

맑은 목소리로 우짖기 때문이다.

중생제도(衆生濟度) 귀한 말씀 펼치기 시작한 땅,

그 법성포.

 

영광(靈光)

일찍이 마라난타(摩羅難陀) 불법(佛法)을 여신 곳이

이제는 원불교(圓佛敎)의 대종사(大宗師)를 내시었네.

영광(靈光)은 문자 그대로 신령스런 빛의 땅.

 

노령(蘆嶺)이 치닫다가 바다를 포옹해서

산과 물이 하나 되어 태극(太極)을 이루신 곳.

누군들 깨치지 않으랴. 그 불갑사(佛甲寺) 범종소리.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

오세영은…

약력 : 1942년 전남 영광 출생, 전남의 장성과 광주, 전북의 전주에서 성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인문대학교수 역임. 1965-68 박목월에 의해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사랑의 저쪽』, 『바람의 그림자』, 『마른 하늘에서 치는 박수소리』 등 시집 25권과 『시론』, 『한국현대시분석적 읽기』 등 학술서적 25권이 있음.

만해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문학상과 국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음. 시집 『밤하늘의 바둑판』영역본은 미국의 비평지 Chicago Review of Books에 의해 2016년도 전 미국 최고시집(Best Poetry Books) 12권에 선정되었음. 영어‧불어‧독일어‧스페인어‧체코어‧러시아어‧중국어‧일본어 등으로 번역된 시집이 있음.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예술원회원.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 (예술원회원)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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