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일 회사원

≪사기≫는 중국 역사서 가운데 명장으로 꼽힌다. 저자 사마천은 흉노족의 포로가 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宮刑:남자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을 당한 이후에 이 역사서를 완성했다. 4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형벌을 당했지만 그 치욕과 고난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지식인들의 필독서로 전해지는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하며 심경을 토로했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마지막 부분에 태사공 자서에 이렇게 글을 남겼다.

옛날 서백창(西伯昌:주나라를 창건한 무왕의 부친)은 유리 감옥에 갇히게 되자 ≪주역≫을 풀이 했으며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경을 당하자 ≪춘추≫를 썼다. 초나라의 우국시인 굴원은 쫓겨난 몸이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실명한 이후에 ≪국어(춘추시대 8국의 역사를 나라별로 기록한 책)≫를 남겼다. 손빈은 동문수학한 친구 방연의 모함으로 무릎이 잘리는 형을 받은 후 ≪손빈병법≫을 저술하였고, 여불위는 촉으로 유배된 이후에 ≪여씨춘추≫를 남겼으며, 한비자도 진나라에 갇힌 몸이 되어서 <세난>의 「고분」편을 지었다.

≪시경≫에 수록된 300여 편의 시는 대체로 성현들이 발분해서 지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마음에 깊이 맺힌바가 있으나 그 뜻을 직접 표현할 수 없었기에 지나간 사실을 빌려 미래에 그 뜻을 전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발분저서’라는 말이 유래 되었다. 어떤 사람이 곤경에 처하거나 가난할 때 한스러운 상황이 도리어 그 사람을 분발하게 하고 걸작을 만든다는 말이다. 불운이 겹친 시절에 명작이 나온다는 뜻이이기도 하다.

궁형은 성기를 자르는 형벌로 가장 치욕스럽고 악독한 형벌이었다. 궁형을 당하느니 자살하는 게 당시 관례였다. 하지만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사기를 완성하는데 전념했다. 사기는 기원전 110년에 시작해 기원전 90년에 완성했다. 그 사이 자칫 사기를 완성하지 못할 위기가 한번 있었다. 완성 한해 전인 한나라 무제 말년에 간신의 이간질로 황제와 황태자 사이에 오해가 생겨 군대까지 동원된 혈전을 벌였다. 결국 황태자가 자살했다.

이때 사마천의 절친인 임안(任安)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관망했는데 양다리를 걸친 노회(老獪:경험이 많은 교활한)한 관리로 지목되었다. 임안은 당시 황제의 비서실장이던 사마천에게 구명을 요청했다. 사기가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터라 집필을 마쳐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거절했다. 그 후 임안에게 ‘보임안서’라는 제목으로 편지를 보내 궁형을 당한 이후의 생활을 이렇게 고백했다.

“간장은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꼬이고 집에 있을 때는 멍 하여 뭔가 잃어버린 듯, 길을 나서도 어디로 가야할지 망망했으며, 궁형을 상기 할 때마다 식은땀을 흘려 옷을 흥건하게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6년 전에는 이릉장군을 위하여 분연히 나섰지만 이제는 임안을 위해 한마디 말도 못하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그는 거절하면서 궁형의 기억을 떠 올리며 몸서리 쳤을 것이다.

사기는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인간 중심 사상이 깃들어있는 객관적 작품이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위대한 명작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 당했기 때문에 힘든 사람들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지도층 인사들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기록하여 후세에 알린 것으로 사료된다.

이경일 회사원 (대한시멘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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