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 영광 여성의전화 활동가

밀레니엄 시대가 열렸다고 호들갑을 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아홉 번째의 해를 맞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사대사상이 막강했던 이씨조선을 지나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인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열강들이 벌인 전쟁의 화마에 휩싸인 채 힘겹게 살아남았고 놀랍게도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룩해 살고 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성장하는 중 우리는 굵직한 국제행사인 2번의 올림픽과 3번의 아시안게임 1번의 월드컵을 치러냈으며 또 지난 해 세계적으로 유래 없었던 평화로운 촛불 혁명으로 부패정권을 몰아내는 등 대한민국의 국민적 저력을 발휘해 세계인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한민국의 성 격차지수는 2017년 기준으로 세계 144개국 중 118위이며 성별 임금격차는 37.2%로 OECD 국가 중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성적을 거두고 있다.

“언니는 지난 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지금은 망자가 된 언니는 형부와 대기업에 다니면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형부는 결혼 초부터 폭력성향을 드러냈습니다. 집요하게 언니를 괴롭혔습니다, 애들이 태어나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폭력이 계속되니 언니는 애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피신한 적도 있습니다. 언니는 애들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지만 폭력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혼하고 싶어도 이혼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언니는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이 글은 2013년 3월 12일 ‘한국여성의전화’ 이메일 상담실에 올라온 내용이다.

1983년 6월 11일 서울 중구청 근처 애플다방 옥탑방을 빌려 전화 한 대로 시작한 ‘한국여성의전화’는 올 해로 35주년을 맞았다. 그 당시 ‘매 맞고 사는 아내들을 위해 전화상담하는 곳이 생겼다’고 알려지자 상담전화가 미친 듯이 걸려왔다고 한다. 1983년 첫 해 전화 한 대로 걸려온 전화는 약 4000여건, 6월에 개소했으니 불과 6개월 만의 일이다. 이는 그동안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정폭력이 얼마나 만연했으며, 또 은폐돼 왔었나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35년, 그 동안 가정폭력특별법, 성매매특별법, 성폭력특별법이 생겨났고 피해여성을 도울 수 있는 사회 구조적 제도와 변화도 많이 생겨났다. 하지만 요즘 들어 자주 드는 생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내가 여성의전화에서 일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남성 또는 여성들이 ‘여성상위시대’인데 요즘도 맞고 사는 사람이 있어요? 라고 질문한다. 폭력의 일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의미의 이 질문.. 그러나, 지난 한 해 동안 영광여성의전화 부설 영광여성상담센터에서만 지원한 내용을 보더라도 약 700건의 상담내용 중 대부분이 가정폭력 피해 상담이다. 56,000여명의 영광군 인구수를 4인 1가구로 계산해 볼 때 약 20%가 가정폭력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5가구 중 1가구는 가정폭력의 피해 위험에 놓여있다는 의미고, 남사스러워서 이야기 못하는 많은 피해여성이 있음을 감안해 볼 때 그 숫치는 더 늘어날 것이며 결국 영광군도 폭력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의미인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여성폭력을 이야기할 때 ‘피해당사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떻게 이겨냈고, 왜 폭력의 피해를 이야기 하지 못 하는가’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도대체 뭔 짓을 했기에 맞았는지’에 대해 더 초점을 맞춘다. 도대체 왜 피해자가 비난받아야 하는가?

올해 초 여자 친구를 폭행해 숨지게 한 30대 남성이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기지 않았나 의심하고 다그치는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 범죄라고 하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피해자 가족이 가해자를 용서하고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하여 “평생 속죄하며 살라”는 당부와 함께 내려진 판결이다. 유가족이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법은 죄 지은 사람에게 죗값에 타당한 형벌을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가해자의 앞날이 구만리 같아서, 유족이 용서하였으므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므로, 술김에, 우발적으로‘와 같은 이유를 들어 가해자 풀어주기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면 앞날이 구만리 같았던 이 여성의 생명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인구는 51,446,201명 그 중 절반은 여성이다. 우리는 여성, 남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2018년 현재 여성폭력의 끝장을 보여주는 각계각층의 성폭력 문제도 결국 여성, 남성 편을 가르며, 피해자는 어디로 가버리고 가해자 앞날이 구만리라 ‘가해자 풀어주기’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한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다. 법은 모든 국민에게 공평해야하고 죄 지은 자를 공정하게 처벌하고 판결해야한다. 그것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권력자건 빈곤한 사람이건 법의 눈은 그런 권력관계를 보아서는 안 된다. 법이 인권을 유린한 가해자의 편에 서면 대한민국 국민 중 어느 누가 안전한 삶을 누리고 영위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법의 판결을 직시하고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권감수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내일을 살아갈 우리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므로...

나는 오늘 주권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책임과 의무에 최선을 다 했는가? 되돌아볼 일이다.

김원 영광 여성의전화 활동가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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