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광여성상담센터에서 지원한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쓴 내용입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바쁜 일상의 어느 날,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늘 있는 안부 전화겠거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는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고 급기야 떨림은 울음으로 변하고 있었다.

언니의 울음의 이유를 다급하게 묻는 나의 질문에 한동안 말없이 울던 언니는 한 사람의 부고를 내게 알렸다.

‘해미 엄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절의 기억을 애써 밑바닥에 가둬두면서 함께 묻혀져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나에게 늘 고마움이었으나 한편으로 힘든 시절의 모습을 담고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기에 힘든 시절을 떠올리는 것이 더 두려워 어떠한 것도 나오지 못하도록 꾹꾹 담아놓았었다.

주위의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알게 된 예닐곱 무렵부터 우리 자매의 어린 시절은 늘 불안했고 위태로웠으며, 긴장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지속적인 외도와 도박, 술 문제로 인해 부모님의 갈등 상황은 잦을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난처해진 상황의 빠른 종결을 위한 아버지의 서슬 퍼런 폭력이 어김없이 엄마에게 날아들었다.

아버지의 폭력 앞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언니와 함께 엄마에게 다가가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한쪽씩 붙잡고 울며불며 “제발 이번 한번만 엄마를 용서해달라”고 비는 것이었고, 그마저도 엄마가 자신이 맞는 모습을 자식들이 보지 못하도록 방문을 잠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에는 부엌에 있는 칼을 모두 베개 밑에 숨겨놓고 이불을 덮어쓴 채 ‘아빠가 제발 칼을 찾지 않도록,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도록’ 울며 기도하는 것만이 힘없는 어린 자매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였다.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울고만 있는 어린 아이로 멈춰 있을 것만 같던 시간이 흘러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을 거쳐 중학생이 되었고, 그 무렵의 아이들에게 찾아온다는 사춘기를 “여유 있는 아이들에게만 허락된 사치”라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해버린 채 모든 신경을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를 엄마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폭력에 자비란 없었고, 인정사정없이 휘두르는 아버지의 거칠고 커다란 손과 발에, 취미로 아버지가 모았던 수석들에 의해 엄마가 정말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온 몸으로 아버지의 몸을 붙잡으며, 딸들만을 둔 채 나가지 않으려는 엄마에게 “도망가 엄마, 제발..”을 얼마나 간절히 외쳐댔는지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의 폭력이 일단락되고 나면 늘 우리 자매는 체육대회를 끝낸 다음 날처럼 목이 쉬고, 전신 근육통으로 인해 한동안 힘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힘이 없어 엄마를 돕지 못했던 어린 시절보다 내가 자라 이렇게나마 엄마를 도울 수 있음에 감사했고, 내가 지금보다 힘이 더 세지면 지금의 상황보다 훨씬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또 바랐다. 그러나 나의 기대가 그저 한낮 환상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폭력은 멈출 줄 몰랐고, 한번 시작된 폭력은 그 도가 점점 심해져만 갔다.

더 이상 우리가 폭력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언니에게 아빠를 잘 잡고 있으라고 당부한 채 파출서로 달려가 “우리 엄마 좀 살려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였고, 한 밤중에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맨발로 뛰어온 나를 그들은 친절하게도 “부모님 일에 자식이 나서는 거 아니다.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며 파출소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나보다 더 힘이 약한 언니가 혼자서 아버지를 막고 있을 생각에 입술은 바짝 타들어갔고, 아버지의 폭력을 말려줄 어른의 도움은 간절했기에 그 길로 파출소에서 나와 평소 나를 예뻐했던 근처 고모네 집으로 가 파출소에서와 같이 도움을 요청하며 다급히 고모와 고모부의 몸을 잡아 끌었다.

나의 부탁에 냉큼 달려갈 줄 알았던 그들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밤이 늦었으니 내일 가보겠노라”고 이야기하며 나를 문 밖으로 내보낸 채 철컥 소리를 내며 문을 잠궜다.

긴 시간동안 아버지의 폭력이 이어지면서 ‘분명 많은 소리들이 바깥으로 전달되었을텐데도 불구하고 왜 단 한 사람도 우리를 도와주러 오지 않는 걸까?’하며 그동안 가졌던 모든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고 엄마와 언니만을 폭력의 상황 속에 남겨둔 채 도움을 요청하러 간 마지막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가정폭력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몸소 느끼며 더 이상 우리가 막고 있을 수도, 우리를 도와주러 올 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엄마와 우리에게 놓여 진 선택지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집 밖으로 도망가는 것 밖에 없었고, 도망을 가야하는 횟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아버지가 쫓아오는 게 얼마나 무서웠던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캄캄한 어둠 속을 달려가다 넘어지고, 돌부리에 찢기고, 유리조각에 찔려도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한 채 우리를 위해 기꺼이 문을 열어 줄 집을 찾고 또 찾아야만 했다.

‘아이들이 자고 있어서, 재워줄 곳이 없어서, 남편이 싫어해서, 아들만 있는 집이라, 집이 더러워서...’ 평소 잘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하룻밤만 재워달라 부탁하는 엄마에게 거절하며 내놓은 답변들이었다.

맨발과 잠옷 차림, 눈물 범벅된 우리의 모습을 보며 분명 “재워주고 말고. 걱정말고 어서 들어와”라고 따뜻하게 맞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혹여 아버지가 쫒아와 행패 부려 자신의 가족들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어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좋은 일한다고 도와줬다가 해코지 당할까봐 등 누구라도 그러하듯 자신의 가정에까지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마음 때문이었음을 안다.

몇 번의 거절이 있고 난 후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엄마는 맨발로 떨고 있는 딸들을 생각하며 자존심을 버린 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가보자고 용기를 내어 찾아간 곳이 해미 엄마네 집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였던 해미와 엄마와 나이가 비슷했던 해미 엄마.

해미 엄마는 우리를 보자마자 이유를 묻지도 않은 채 집으로 들어오라며 우리의 손을 잡아 끌었고, 더러운 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춥겠다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평소 교차점이 없어 친하게 지낼 일이 없었던 엄마와 해미 엄마는 그날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이어갔고 우리는 그 이야기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해미 엄마는 집으로 돌아가는 엄마와 우리를 보며 “우리 집은 매일 늦게까지 잠들지 않는다.”며 언제든지 자신의 집으로 와도 좋다고 이야기 하였고, 그 날 이후 해미네 집 현관 불은 언제 또 어둠 속을 달려올지 모를 우리를 위해 언제나 켜져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해미 엄마 집으로 몸을 숨기기를 여러 번, 몇 번의 해를 넘겼고, 언니와 함께 그토록 꿈꾸던 독립을 하게 되고 사회에 나와 알게 된 상담소의 도움을 받아 엄마를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탈출시킬 수 있었다.

누구보다 엄마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면서도 누구보다 엄마의 자유를 지지하며 응원하며 축하해주었던 해미 엄마.

기나긴 시간, 힘들었던 시간 속에서 그래도 버텨가며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같이 있어 줄께’라던 해미 엄마의 따뜻한 말 한마디, 진심어린 걱정, 따뜻한 손길, 편견 없이 바라봐주는 시선 때문이었으리라.

불과 30년 전 있었던 이 일은 비단 우리 가족에게만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우리 주변에는 해미 엄마와 같은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무수히 많은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존재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관심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제 2의 해미 엄마가 되어주는 것. 가정폭력의 피해자와 그 가족, 더 나아가 그 사회를 살릴 수 있는 작지만 가장 큰 실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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