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 라고 말하였다. 만남은 오래도록 우려낸 진국과 같은 관계와 가고자 하는 곳을 가기 위해 버스를 한 번 타고 내린 그런 관계, 세월만 진국처럼 많이 흘렀지 버스를 한 번 이용한 것과 같은 형식적 관계와 한순간의 만남이었지만 진국처럼 가슴에 새겨지는 경우도 있다.

교사인 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학생들과 만남이 대개 이 범주에 든다. 나는 사람에게 설렘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담임을 맡을 때마다 설렘과 함께 아이들과 관계가 진국처럼 되기를 희망한다. 종진이와 만남도 그랬다.

3년 전 봄. 종진이는 내가 맡은 1학년 학급의 아이였다. 학기 초 학교 환경도우미 할 아이 손들어 보라하니 아이는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나는 여느 아이들보다 공동체 정신이 조금 강한 아이일 거라는 생각과 입학 성적이 중간 정도이니 마음속으로 평상시 아이라는 생각이 교차되었다.

그해 두 번째 모의고사가 5월에 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일어났다. 아이의 전체 성적이 10등 안에 들었다. 나는 그때부터 “아! 저놈이 공부도 잘하네.” 라고 생각하면서 내 머릿속에 공부분야의 리스트에 처음 올랐다. 그 후 아이는 내 눈에 자주 띄었다. 내가 출근을 할 때마다 학교 정원 “햇빛촌”에서 열심히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였다. 날씨는 갈수록 점점 더워졌고 아이의 교복은 땀 얼룩이 져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하였다. 봉사활동 시간이 끝나면 가방을 들고 구름다리에서 만나곤 했는데 가방에 책을 많이 넣어 두 손으로 책가방을 받치며 겨우겨우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보다 못한 내가 “종진아! 사물함이 있는데 왜 그렇게 들고 다녀.” 라고 말하면 “집에서도 공부해야지요.” 말하면서 급하게 나를 지나쳤다.

그때 나는 국사를 가르쳤다. 아이들은 수학보다 국사 시험이 어렵다고 말하곤 하였다. 나는 학생들을 인간답게 길러내는 과목이란 자부심으로 가득 차있었다. 내신이 중요한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나의 설명을 노트에 깨알같이 정리하여 그것을 토대로 질문을 많이 했다. 특히, 아이는 자기 노트에 각 반에서 공부 잘한 학생의 노트를 빌려 노트정리를 보강하였고, 거기다 한국사 인증 1급 문제지, 참고서 8권을 통째로 사서 항상 1~2학년 성적이 1등급이었고 전체 성적도 2등으로 올라섰다. 아이는 학교 환경 도우미 ‘녹색단’이라 환경부 담당 선생님이 지도했었고 내가 직접 학급 일을 시킨 적은 없고 부모 또한 전화를 걸어온 적이 없으므로 평상시 학생들처럼 아이와 나는 그런 관계였다.

아이는 2학년 때도 우리 반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올해 나는 1학년 담임과 교과 과목 선생님이어서 3학년에 진학한 아이와는 학교 안에서 공식적인 관계는 끊어졌다. 3월 말이었을까, 아이는 ‘한국사 인증시험 1급’을 본다며 무시로 나를 찾아와 질문하였다. 아이는 그렇게 나와 인연을 이어갔고, 마침 나도 사회과 부장을 맡아 학생들을 ‘통일 골든벨 전남대회’에 출전시켜야 했다. 나는 평소 문과 지식이 많은 아이에게 대회 출전해 달라고 부탁하자 아이는 흔쾌히 대답하였다. 결과는 노력한 만큼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대회를 마치고 버스 안에서 아이의 얼굴과 마주치자 허탈 웃음을 지으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아이는 나에게 ‘추천서’를 써 달라고 하였다. 나는 당시 1등이었던 학생도 1, 2학년 때 내가 담임을 했기에 그 아이와 상의하여 오라고 하였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아이는 교무실에 와서 1등 학생과 이야기를 했으니 자기를 써주면 된다고 말하였다. 나는 “알았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마음속에 큰 짐이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이 아이를 표현해 줄까?’ 수업을 가고 오면서, 점심을 먹고 학교 울타리 도로를 걸으면서, 늘 그 생각만 하였다. 그러던 중 한 생각이 떠올랐다. 2년 동안 나의 눈에 비친 모습을 아이의 이성과 감정으로 들어가 보자. 아마 이 아이를 표현하는 방법은 그 속에 있을 것이다. 아이의 부모가 경제적이나 지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는 가정환경은 나의 어린 시절과 많은 부분이 비슷했다.

5년 전에 나는 차를 사면서 CD를 빼고 카세트테이프를 샀다. 운전할 때마다 옛날 노래를 틀고 회상에 빠지곤 한다. 그날은 여름인지라 하늘에 괄약근이 풀어졌는지 비가 억수로 내렸다. 3단으로 올린 와이퍼는 내 생각만큼 쉼 없이 유리창을 가로저을 때 가수 이미자의 ‘섬처녀’란 노래가 흘러 나왔다. 노래를 듣는 순간 ‘섬처녀’ 가사의 기다림과 힘없는 갈망의 눈빛이 떠오를 때쯤 그와 비슷한 단어 ‘선머슴’ 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바로 이거야. 아이를 한마디로 표현해 줄 수 있는 말은 바로 이거야!’ 하면서 무릎을 쳤다. 주제가 정해지니 그다음은 ‘갈아 마신다.’, ‘사회적 세련미’란 단어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아이의 추천서는 봇물 터졌다. 쓰는 시간부터 7시간 걸려 속사포처럼 써 내려갔다. 너무나 특징적인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누구나 처음 보면 선머슴처럼 생겼다. 하지만, 어떤 일에 몰입하면 ‘나 몰라. 그냥 책을 갈아 마시겠어.’가 아이의 표징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양질 전환의 법칙’은 이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고교생활에서 공부하다 보니 사회적 세련미가 미숙하니 이 부분은 서울대학교에서 책임져주라고 마무리 지었다.

11월 중순 진학부장이 나에게 와서 내일 서울대학교 입학사정관이 오니 퇴근하지 말고 기다려 주라고 부탁하였다. 입학사정관이 온다는 그 날 아침부터 아이는 나를 찾아왔는데 안절부절못하였다. 나는 “종진아! 걱정 말아라. 오늘 3시에 면학관 205호로 와라. 나와 면접 예비연습을 해보자.”라고 말하면서 마음을 진정시켜 주고 오후 1시간 동안 면접 예행연습을 하였다. 면접하는 동안 아이는 어찌나 긴장하는지 나는 수차례 아이 마음을 안정시켜야 했다.

오후 5시 50분, 기다리고 기다리던 입학사정관이 도착하였다. 학생 면접 전에 추천서를 쓴 선생님 면담이 있었다. 두 분의 남녀 사정관이 면담 장소에 나와 있었다. 먼저 여자 사정관이 나에게 물었다. “이 학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선머슴”이라고 대답하였다. 얼굴을 보면 까무잡잡하고 진짜 멍청할 것 같은 인상인데 공부도 잘하고, 청소도 물불을 안 가리고 하며 가방은 책을 가득 넣고 그것도 모자라 몇 겹의 책을 어깨와 겨드랑 사이로 들고 다니니 모르는 선후배가 없는 기인이며 해룡고등학교 스타라고 이야기 하였다. 그러자 사정관은 “어떻게 공부하나요?” 라고 재차 물었다. 나는 한 마디로 우리가 흔히 모르면 “그냥 외워. 아니 책을 모두 갈아 마셔 불어.” 그러면 이 양이 견디지 못해 질적으로 변한다는 철학적인 용어와 또한 공수특전단의 구호 “안 되면 되게 하라.”인데 이것에 가장 부합한 학생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는 서울대학교에서 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학생이나 학교가 지금까지 이 학생의 모든 능력을 발휘해 주었지만 사회적 미숙함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니 사회적 세련미는 서울대학교에서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만 있던 남자사정관이 “선생님! 추천서 진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사회적 세련미가 마지막에 쓰여 있더군요.”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의 거짓 없이 아이를 본 대로 느낀 대로 이야기했다고 말하였다. 면담은 이런 식으로 30분 동안 진행되면서 끝났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출근하자, 서울대학교 면접을 본 4명의 학생에 대한 면접 평이 무성했다. 일부 선생님들은 아이(종진)가 답변을 못 했다고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사회적 세련미를 서울대학교 입학 사정관에게 말한 것과 아이의 인상이 내가 말한 대로 똑 들어맞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합격자 발표가 있는 금요일 오후 5시 10분쯤. 아이에게 문자가 왔다. ‘선생님, 합격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의 3년 세월이 주마간산처럼 밀려왔다. 한참 감정을 추스른 후 나는 아이에게 “종진아! 장하다. 눈물이 난다.”라고만 말하고 전화를 끊어야 했다. 그동안 자기소개서 지도, 면접, 가난한 부모의 애절함과 그런 가정에서 용(龍)이 되어 준 점 등이 어우러져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그날 저녁 퇴근길에 나는 또다시 카세트테이프에서 이미자의 ‘섬처녀’를 틀었다. 가사는 어느새 ‘구름 가네. 바람 가네. 나도 한 번 물새처럼 훨훨 날아가 봤으면…’를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아이에게 중얼거렸다. ‘다시 한 번 종진아! 축하한다. 앞으로 너의 인생을 일반적 아이들과 유추해보면 축복된 일이 많을 게다. 그런 만큼 너도 이제 가난한 많은 아이에게 빛과 소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병환 해룡고등학교 교사 (수필가)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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