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한 사발을 앞에 두고 그는 말했다. 고등학생들이 갈수록 이해 타산적이고 현실적이어서 아이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미래에 대한 설렘을 갖게 해 주고 싶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얘들아! 오늘은 선생님이 너희 가슴에 감정을, 그것도 선생님만의 방식으로 뿌려주고 싶다.”

경쟁이 비끄러매져 일상화된 아이들은 때꾼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실장을 교탁 앞으로 불러냈다. “이것 좀 감정을 넣어서 크게 읽어줄래.”

아이 손에는 시인이며 수필가인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수필을 쥐어주었다. 수필 낭독이 시작되자 아이들의 눈이 어색한 듯 보였다. 낭독은 어느새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라는 부분을 읽을 때 아이들의 눈은 차차 맑아져 정이 담기기 시작했다. 긴 글은 아이들에게 몇 번의 감정의 폭우를 일으키면서 끝을 맺었다. 박수 치는 아이들이 보였다.

다음은 빔프로젝트 화면에 가수 박인희가 낭독한 “목마와 숙녀”를 들려주었다. 음악이 나오자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눈물을 보였다. 낭독은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라는 대목을 지날 때 그 아이는 흐느꼈다.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뭔가 잃어버린 눈빛과 희망의 눈빛이 교차하는 듯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아이들에게 그는 말했다. 고등학생 때였다. 어느 날 점심시간 끝 무렵, 방송부에서 ‘목마와 숙녀’가 흘러 나왔다. 순간, 자다가 번뜩 일어나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일어나 한 발자국도 뛸 수 없었다. 그저 앉은 채 나 자신에 대한 생각과 일반적으로 존재는 어떠해야 하는 가를 가슴 속에 송두리째 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수 박인희가 부른 ‘끝이 없는 길’을 들려주었다. 익숙하지 않은 반주지만 ‘목마와 숙녀’의 낭독으로 노래는 친근해진 듯 했다. ‘길가에 가로수 옷을 벗으면 떨어지는 잎새 위에 어리는 얼굴. 그 모습 보려고 가까이 가면 나를 두고 저 만큼 또 멀어지네. 아 이 길은 끝이 없는 길, 계절이 다 가도록 걸어가는 길.’…

노래가 끝났다. 아이들의 얼굴이 포근해졌다. 한 아이가 박인희에 대해 물었다. 그는 말했다. 어릴 적부터 트로트를 좋아했다. 그것은 아마도 선생님 집뿐만 아니라 이웃도 어렵고 힘들게 살았는데, 그 지친 삶을 위로해 주는 유일한 것이 트로트라고 생각했다. ‘목마와 숙녀’를 통해 박인희라는 가수를 알게 되었고 라디오를 들으면 간혹 그녀의 노래 ‘끝이 없는 길’이 흘러나올 때 어딘지 모를 이상향을 향해 내 마음은 뛰어 가고 있었다. 학창시절 가야 할 길은 먼데, 박인희라는 가수를 보면 목소리 좋지, 노랫말을 쓰는데 그저 평범하게 쓰지 않고 존재에 대한 그 무엇을, 그리움을 주면서 쉽게 잘도 쓰지, 작곡도 하지, 도회지에서 대학을 나온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지, 내가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아이들을 쳐다보니 가슴의 감정에 보슬비가 내리고 눈동자는 윤슬처럼 잔잔하게 빛나고 있었다.

박병환 해룡고등학교 교사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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