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國士)란 나라의 선비, 즉 훌륭한 인물을 말한다. 이 말은 소하(蕭何)가 한신(韓信)을 가리켜 말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한신은 회음(淮陰:현재의 강소성) 사람인데 망한 한(韓)나라 왕족(王族) 후손(後孫)으로 젊었을 때는 몹시 가난한데다가 농사일이나 글공부 같은 데는 별로 관심이 없이 하늘을 날고 싶은 큰 뜻만을 품고 다녔기 때문에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한신이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한신의 배고픈 기색(氣色)을 본 빨래하는 노파(老婆)가 자기가 먹으려고 싸간 점심을 그에게 나눠 주었다. 그 노파는 빨래를 하러 나올 때마다 수십여 일간 매일같이 신에게 점심밥을 주었다. 한신이 감격한 나머지, “언젠가는 이 은혜를 후(厚)하게 갚을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노파는 성난 얼굴로 “대장부(大丈夫)가 스스로의 힘으로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이 딱해서 그랬을 뿐이지, 뒷날 어떤 덕(悳)을 보려고 그런 것은 아니니, 아예 그런 말은 마시게” 하고 핀잔하듯 말했다. 언젠가는 또 한신이 회음 저잣거리를 거닐고 있는데, 읍내 푸줏간의 한 젊은이가 갑자기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봐, 자넨 덩치도 크고 제법 칼까지 차고 다니지만, 실상(實狀)은 겁이 많은 녀석 이지. 죽는 게 두렵지 않거든, 어디 그 칼로 나를 찔러봐. 만일 그럴 용기(勇氣)가 없거든 내 가랑이 밑을 기어서 지나가봐.” 한신은 난처했다. 한참 바라보던 끝에 씩 웃으며 엎드려 철부지 녀석의 다리 밑으로 슬슬 기어 나갔다. 이때를 일러 하지욕(跨下之辱) 이라 한다. 온 장바닥 사람들이 한신의 겁 많은 행동을 보고 크게 웃었다. 뒷날, 한신은 초(楚)나라 제후(諸侯)가 되어 돌아왔을 때, 빨래하던 노파에게는 천금을 주어 옛 정에 감사하고, 옛날의 그 젊은이에게는 복수(復讎) 대신 중위라는 수도 경비(警備)관 벼슬을 내리고는, 여러 장수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장사다. 그 때 나를 모욕(侮辱)했을 때, 내가 어찌 죽일 수 없었겠는가. 다만 죽일 만한 명분(名分)이 없었기 때문에 참고 따랐을 뿐이다.”

이것은 한신이 지난 날 자기에게 설움을 준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없애 주기 위한 하나의 계책(計策)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일단은 무슨 조치(措置)가 있어야만 할 일이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자신의 아량(雅量)을 보여 주는 길을 택(擇)했던 것이리라. 실상(實狀) 천하를 상대하는 한신으로서는 그런 철부지 소년의 탈선(脫線)행위가 깜찍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것은 뒷날 이야기이고, 한신이 처음 벼슬을 한 것은 항우(項羽) 밑에서 집극랑 이라는 현재 우리군대의 위관급 에 해당되는 작은 벼슬이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항우에게 좋은 계책을 말해 보았으나, 전혀 상대조차 하지 않고 묵살(黙殺) 해버린다. 항우는 자기 힘만 믿고 인재(人材)를 구할 생각이 없었으며, 또 그만한 안목(眼目)도 없었다.

한신은 항우 밑에서 도망쳐, 멀리 유방(劉邦)을 찾아 한나라로 들어가는데 장자방이라 알려진 장량이 한신의 됨됨이를 보고 추천했으나 증표를 얼른 내놓진 않았다. 그러나 한나라 장군 하후영 에게 인정을 받아 군량을 관리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 에 임명(任命)되었는데, 이때 승상(丞相)인 소하(蕭何)와 알게 되었다. 소하는 한신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게 여러 번 추천(推薦)했으나 써 주지 않았다.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항우의 세에 밀려 유방이 남정으로 떠나게 되자, 군대와 장수들이 실망 끝에 자꾸만 빠져 달아났다. 이에 한신도 더 바랄 것이 없어 그들 뒤를 따랐다. 승상 소하는 한신이 도망갔다는 말을 듣자, 한고조에게 미처 말할 사이도 없이 허둥지둥 한신의 뒤를 쫓았다. 소하까지 도망쳤다는 소문이 한고조의 귀에 들어갔다. 고조는 두 팔을 잃은 기분으로 어쩔 줄 몰랐다. 소하는 누구보다도 신뢰(信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틀 뒤 소하가 한신을 데리고 돌아왔다. 고조는 한편 반갑고 한편 노여웠다.

“어찌하여 도망을 했는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 도망친 사람을 붙들러 갔던 것입니다.” “누구를 말인가?” “한신입니다.” “거짓말. 수십 명의 장수(將帥)가 달아나도 뒤쫓지 않던 그대가, 왜 한신만을 뒤쫓았는가?”

그러자 소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장수라면 얼마든지 보충(補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신만은 국사로서 둘도 없는(國士無雙) 사람입니다. 임금께서 한중의 왕으로 영영 계실 생각이라면 한신 같은 사람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를 놓고 겨룰 생각이시면 한신을 빼고는 상의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한신은 소하의 강력(强力)한 추천(推薦)으로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어 마침내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統一)하는 공(共)을 세웠던 것이다. 나중에 초나라 왕이 된 후 한신을 측근에서 모시던 괴통(蒯通)이 천하삼분(天下三分)을 건의 하는데 듣지 않고 또 다른 고사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남긴다.    <이경일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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