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의 한 호텔. 삼성그룹 임원 200여명이 모였다. 이건희 회장이 일갈(一喝)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대대적 변화를 주문해한 것이다. ‘신경영 선언’이다. 우리 사회에 충격파가 됐다. 그 말은 유행어가 됐다. 그때부터 대중 앞에서 마이크 잡는 사람들의 단골 메뉴가 생겼다. “변해야 산다.” 그건 약과다. 다음해의 발언은 ‘신경영 선언’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

정치권과 관료사회를 ‘저질’이라고 한 것이다. 이 정도면 ‘도전’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들은 “삼성이 저래도 되나”고 생각했다. 지켜봤다. 그래도 됐다. 누구 하나 이 회장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토를 달지 못했다고 해야 옳다. 손가락 하나로 경제인들을 다루던(?) 정·관계 인사들이 못들은 척 했다. 이 회장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적 공감을 샀다.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삼성은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했다. 기업들은 2류를 벗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래도 아직 1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다. 도덕적 실천(노블리스 오블리쥬)이 결여된 기업은 아무리 덩치가 커져도 1류는 못된다. 3류와 4류들은 어떤가. ‘변해야 한다“는 말은 가장 많이 한 집단이다. 그 쪽은 오늘도 그 모양 그대로다. 아니, 오히려 뒤로 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법조계는 그 민낯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구린내가 진동한다. 법조 3륜(輪)이라는 검사·판사·변호사들의 민낯 보기가 민망하다. 시정잡배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짓거리들을 태연하게 저지르고 있었다. 드러나지 않은 속살은 어떨까. 그들에 의해 범죄자로 낙인찍힌 모두는 억울하다고 할 것이다.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국민 앞에 사과한다. 보기 민망하다. 보고 싶지 않다. 해군 참모총장을 비리 혐의로 구속했다. 총장은 아파트 한 채가 전 재산이었다. 딸 퇴직금까지 변호사비로 날렸다. 대법원은 무죄 판결했다. 청렴한 4성 장군을 ‘해적’ 취급했다. 검찰이 저지른 ‘범죄’다. 이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은 보고 싶다.

행정 관료들은 존재감이 없다. 국민들은 장관들 이름조차 모른다. 인사청문회를 통해 본 그들은 한결같았다. ‘착한’ 목민관의 길은 뒷전이었다. ‘졸부’가 되는 길만 찾아다녔다. 누가 존경하고 기억하려 하겠는가. 윗물이 그럴진대 아랫물은 말해 뭐하나. 혁신과 창조, 청렴과 봉사를 기대하겠는가. 그래도 노력하는 소수에 의해 ‘3류’ 수준은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4류’라던 정치는 입에 담기 어려운 지경으로 후퇴했다. 정치에 국민은 없다. 당만 있다. ‘지들’끼리 싸우기만 한다. 시비만 건다. 편싸움에 열중이다. 국회의원의 의견은 없다. 당론만 있다. 이럴 바엔 300명씩이나 필요 없다. 대여섯이면 충분하다. 오히려 효율적일 것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보다 못한 정치, 정치인들만 있다. 국정감사를 보이콧하는 여당. 국회의장 사퇴에 목숨 걸겠다는 여당 대표. 대선 후보를 사실상 정해 놓고 경선 운운하는 두 야당. ‘4류’ 때가 좋았다는 자탄을 금치 못한다. 5류도 못된다. ‘아류(亞流)’다.

이런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겠는가. 경제와 안보가 위기란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지진까지 더해졌다. 왜 이런가. 누구 탓인가. 국민 입장에선 ‘나랏님’ 탓을 할 수밖에 없다. 소통과는 담을 쌓은 대통령을 탓 해봤자 지만. 비상시국이란 말만 한다. 어쩌란 말인가. ‘신의 한수’가 필요하다. 공개모집이라도 해야 한다. 고집은 이제 그만 내려놔야 한다. 묘수를 내야 할 정치부터 정상적으로 돌려놔야 한다.

국정감사가 급하다.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는가는 돌아보고 바로잡아야 하니까. 미르와 K스포츠 재단 설립에 청와대 개입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두환의 일해재단과 닮았다. 국감이 불편할 수 있다. 별 잘못도 없는 국회의장 탓하며 국감을 거부한 129명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묻는다. 국가에 충성하고 있는가. 대통령에게 충성하고 있는가. 다시 시작한 국감에서 ‘꼬장’이나 부리려거든 관둬라. 아류 정치의 아류 국회의원이 아니라면 시비를 하지 말고 정치를 하라. 정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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