펴이어도

펴이어도 다 못 펴고

남은 뜻은

고국이 그리워서냐

노상 맘을 감기이고

비듯이 펴인 잎은

갈갈이

이내 찢어만지고.

詩. 조운-파초(芭蕉)

끝없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으로 인해서 화자의 가슴은 갈갈이 찢어지고….

시조시인 조운생가터

완연한 추운 겨울 금요일 조운 생가를 찾았다. 중학생 시절(필자의 고향은 고창이다) 당시 국어선생님께서는 우리지역에서 가까운 영광군에 유명한 시조 시인이 있었다며 그 당시 시대상과 조운 시인이 월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주셨다. 참 아까운 시인이 우리문학 발자취에서 사라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하시던 선생님의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 문학에 관심이 있던 학생은 그 시인이 누구일까 하는 궁금함을 품고 지냈다. 그렇게 2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조운생가를 방문하게 됐다. 조운 생가 주변의 꽃들은 다 져 없어졌지만 파초, 도라지, 채송화, 오랑캐꽃, 무꽃, 옥잠화, 야국 등 여느 시골집 마당에서 볼 수 있는 꽃이 시로 피어있다.

생가 마당을 둘러보다가 조운 시인의 시 ‘석류’의 모티브가 된 석류나무를 찾았다. 우거진 잡풀 더미 어디에서도 석류나무는 보이지가 않았다. 알아본 결과 어느 누군가 석류나무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시인의 시제가 된 석류나무조차 “알알이 붉은 뜻” 때문에 베어졌을까?

‘월북’의 틀에 갇혀 쇠락해가는 생가

시조시인 조운. 문단은 그의 시어가 ‘세월이 흐를수록 빛이 난다’고 평한다. 시인만큼 독립과 민족의 교육에 헌신한 인물도 드물다. 남북이 이어지고 있다. 1988년 월북 작가 작품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뤄졌다. 30년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 그의 고향 영광은 그를 ‘월북’의 틀에 가둬놓고 있다. 그의 생가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든 듯 쇠락해가고 있다.

시조시인 조운(曺雲)은 1900년 6월 26일에 전남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 구름다리 옆집에서 태어났다. 본명이 주현(柱鉉), 자가 중빈(重彬)인데 1940년부터 집앞의 구름다리를 딴 운(雲)을 필명 겸 본명으로 써 왔다. 네 살 때 일찍 부친을 여의고 7남매 중의 외아들로 자란 귀공자풍의 선비였다.

영광 사람들과 함께 찾은 금강산 비로봉(1930) 왼쪽 첫 번째가 '조운'

3·1만세 등 반일운동 주동, 옥고 치러

상업학교 졸업 직후 영광에서 3ㆍ1 운동에 주동으로 가담했는데 그 일로 일경의 추적을 피해 만주로 망명, 시베리아 등지를 유랑했다. 1921년에 귀향한 조운은 중등학교 과정인 사립영광학원의 조선어 교사로 취임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향토문화 진흥에 힘썼다. 시조창작에 정진하는 한편 향토문예지인 <자유예원(自由藝苑)>을 등사판으로 발행했다.

동시에 시조동우회인 추인회를 결성하여 매월 시조 짓기 대회를 가졌으며 가람(이병기) 선생도 초대하여 강연회 등을 열었다. 1922년에는 동아일보 독자란에 자유시 「불살라주오」를 활자화시켰다.

서해 최학송의 묘비 제막식에 모인 문인들(1934) 뒷줄 오른쪽 끝이 '조운'

1924년말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넘을 때」 등 자유시 3편을 발표하여 문단에 진출했다. 또 이듬해에는 같은 학교에서 동료 교사로 근무하던 박화성을 춘원에게 주선하여 <조선문단>에 작가로 등단시키는데 도움을 줬다. 그리고 그 무렵에 그는 만주여행 때부터 사귀어 온 서해(曙海) 최학송을 한 살 터울 누이인 분녀와 혼인시키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뿐만 아니라 동향출신으로서 월북한 시조시인 조남령(曺南嶺)을 배출하는데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운은 그 후에도 주로 고향에 거주하면서 동향의 문우인 조희관 등과 청년회·영농회·토우회·추인회 등을 이끌며 한글강습회, 시조강좌 개최 등으로 향토문화 진흥에 전념했다. 30년대 중엽에는 영광 금융조합에 근무하면서 민족자각운동의 일환으로 갑술독서회를 결성하여 반일운동을 펴다가 이른바 영광체육단 사건으로 1년 반 남짓 옥고까지 치렀다.

조운 석류나무 시 모티브가 된 조운생가터 석류나무

해방 직후에는 영광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았고, 문학가동맹에 가입한 바 있다. 그리고 1947년에는 가족을 데리고 상경하여 동국대에 출강하며 시조론을 강의했다. ‘조운시조집’을 간행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하지만 1949년 가족과 더불어 월북하였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황해도 대표위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을 지냈다. 또 고전으로 ‘춘향전’을 연구하였으며, 박태원과 함께 ‘조선구전민요집’ ‘조선창극집’을 출간했다. 그러다가 1956년의 이태준 계열 숙청 이후 몰락했다가 구제된 것으로 전해진다. 「인민시인 신재효」(1957), 「아브로라의 포성」(<조선문학>, 1957), 「평양판관」(<조선문학>, 1958) 등을 발표하였다.

조운은 현대시에서 시조로 시형을 바꾸어 창작하면서 현대 창작시조와 시조시형 연구의 지평을 넓힌 현대시사의 중용한 지점에 있는 시인이다. 활발하게 시조를 창작하던 그의 월북은 많은 의문을 남겼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현대시사에서 그의 위치를 소거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1988년 해금되었으나 업적에 비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북한에서 발간된 잡지 ‘천리마’ 1964년 4월호에 실린 ‘조선음식’

‘조선혼’을 노래한 표범 같은 시인

조운은 “시도 여기까지 이르면 시신도 감히 기 앞에 묵언의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시가 스스로 우러나므로 시를 쓰는 천래적 시인”이었다. 또한 “선배 시조시인들이 채 벗어나지 못했던 유가적 관념의 벽을 허물고 서민적 리얼리터를 성공적으로 시조문학에 도입함으로써 생활시로서 시조의 새 길을 열어 놓았다”.

그는 일제하 사상사적 맥락에서도 한치의 흔들림 없이 ‘조선혼’을 노래한 “표범 같은 천재시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말버릇이 시조라는 율격과 어울리어 이루어내는 놀라운 활력은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조운 특유의 사실적 재치와 해학”이 두드러진 작품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적 성과는 월북 후 분단을 거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통치의 수단으로 작동함으로써 한 동안 연구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다행히 해금 이후에 두 번에 걸쳐서 발간된 「조운 문학 전집」과 「조운 시조집」은 흩어진 작품을 한 자리에 모으는 성과를 얻었다. 그리고 「조운 평전」은 조운의 삶과 시세계를 밝히고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

가람 이병기(1891∼1968) 선생이 조운, 조남령과 함께 엮은 ‘현대시조삼인집(現代時調三人集)’

작품과 생애 영광문학총서에 망라

작품집으로 월북 전에 펴낸 「조운시조집」(1947)이 있고, 최근 고향의 유지들이 출간한 「조운(曺雲)문학전집」(1990)이 있다. 월북 전의 시조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시ㆍ시조ㆍ산문 등) 65편을 포함하여 130여편이 실려 있다. 최근(2018년) 조선대 이동순 교수가 영광문학총서 제1권 조운문학전집(2018)에 그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망라했다.

그의 시작품들은 대체로 단아한 정조로서 전통적인 정한의 세계를 즐겨 다루고 있어 돋보인다. 남다른 언어의 조탁에다 섬세한 개성미를 지닌 채 공감을 얻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전혀 이념적인 색채가 없고 자연이나 인간의 평이한 서정을 읊은 순수문학성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위치 :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중앙로2길 34-8

유창수 기자  news@ygweekly.com

<저작권자 © 영광군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