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일 회사원

한나라 무제 때 병길(丙吉)은 노나라출신으로 율령을 배워 처음에는 옥리(獄吏)를 하다가 나중에는 정위감에 올랐다. 그 뒤 무고의 옥사 때 큰 활약으로 태자의 손자인 유순(劉詢:나중에 선제가 됨)을 구출하여 목숨을 살렸다. 이 사건은 무속인의 무리들이 궁인을 무속의 힘으로 유혹하기위해 나무인형을 묻고 제사를 지낸 사건이었다.

당시 무제는 병석에 누워있었는데 황손이 군저옥(郡邸獄)에 갇히게 되었다. 병길은 태자의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으며 황증손역시 억울하게 갇힌 것을 안쓰럽게 여겨 끝까지 보호 하고자 했다. 무제의 병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나이가 많고 병 때문에 판단력마저 흐려졌다. 장안옥 에서 천자의 기운이 비친다는 방사(方士)들의 말만 믿고 무제는 “죄의 경중을 가리지 말고 옥에 갇힌 모든 죄인들은 사형을 시켜라”고 명령했다.

황제의 사자들은 옥마다 다니며 모든 죄수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황손이 갇혀있는 군저옥에 까지 왔으나 병길은 목숨을 걸고 문을 굳게 닫아 사자들과 새벽까지 대치하며 “이곳에는 황증손이 있다. 보통사람도 죄 없이 죽어서는 안 되는데 황증손이야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사자는 하는 수 없이 돌아가 무제에게 고해바치며 병길 에게 벌을 줄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무제의 대답은 의외였다. “사람의 목숨은 아무나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도 하늘의 뜻이다.” 라고 하면서 대 사면(赦免)령을 내렸다.

이 일로 인하여 병길은 본이 아니게 황증손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죄수들을 살린 셈이 되었다. 그 뒤 무제가 죽고 소제가 왕위에 올랐으나 얼마 안 되어 후사가 없이 죽자, 이어 창읍왕 하(賀)가 추대 되었으나 금방 폐출되고 무제의 증손 즉 병길 때문에 죽을 위험에서 살아난 순(詢)이 왕이 되니 그가 곧 한(漢)선제(宣帝)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공을 내세웠겠지만 도량이 큰 병길은 묵묵히 맡은 일만 충실하게 해냈는데, 선제는 병길 때문에 목숨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뒤 어떤 연유로 생명의 은인이 병길 이란 사실을 안 선제는 승상으로 임명하고 박양후에 봉하며 1300호의 식읍을 하사했다. 왕 다음 최고의 자리에 오른 병길은 어느 날 외출을 하는데 천자의 경호원들이 집단 난투극으로 유혈이 낭자해 눈뜨고는 볼 수 없이 살벌하게 싸우는 상황이었으나 못 본 체 하고 그냥 지나갔다. 얼마쯤 후 가던 길을 가는데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다. 초봄이라 아직 추운데도 소가 몹시 헐떡거리며 땀이 범벅이 되어 힘겨워 했다.

병길은 밭가는 농부를 불러 물었다. “오늘 이소로 몇 마지기의 밭을 갈았느냐?” 그러자 옆에 따르던 비서는 승상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 전 유혈이 낭자하고 사상자 까지 나는 장면은 못 본체 지나치던 분이 소가 힘겨워 하는 장면을 소를 부리는 농부에게 꾸짖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여 수행비서가 승상에게 물었다. 그러나 병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싸움으로 사상자를 낸 자들은 치안을 담당하는 경조윤(京兆尹:수도의 판윤 우리나라 서울 시장에 해당함)이나 장안령(長安領:치안 담당자)이 할 일이다. 재상인 나는 연말에 가서 이 고을 치안 담당자에게 직무태도를 물어 상벌을 내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초봄에 농사가 시작될 시기인데 소가 몹시 헐떡거리며 땀을 흘리는 현상은 기후의 이변이 아닌지 소가 일을 한 양을 물은 것이다. 만약 기후의 이변이 생긴다면 흉년이 들 터인즉 미리 대비책을 세우기 위함 이다. 재상은 음양을 조화도 살펴야하고 계절의 순응에 책임도 있는 것이다.”

참으로 백성을 위한 사랑하는 마음이 녹아 있는 명언이다. 병길은 소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여 생계를 걱정했던 것이다. 이런 위정자들을 본받는다면 만백성이 모두 좋아할 것이다. 요즘 위정자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가르침이다.

이경일 회사원 (대한시멘트)  news@ygweek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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